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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카사노/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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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카사노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AS 바리

태어나서 머리가 굵을 때까지 빈민가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불우한 흙수저로 살았다. 카사노의 친부는 카사노의 어머니가 임신한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도망가버렸고, 그 때문에 홀어머니 슬하에서 힘들게 자랐다고 한다.[1] 그러다 AS 바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아 입단한다.


그리고 99-00 시즌, 18세의 나이로 성인 팀에 입단하여 당시 인테르와의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 2명을 완전히 관광보내는 미친 플레이를 선보이며 이탈리아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2]

그 이후로 엄청난 활약을 통하여 수많은 빅 클럽의 러브콜을 받았고, 결국 2001년 AS 로마에 입단한다.

1.2. AS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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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토티와 카사노의 콤비는 정말 역대급에 들어갈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카사노는 자신에게 엄격했지만 애정을 주는 카펠로 감독에게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받고 그의 지시를 잘 따랐다. AS 로마는 둘의 환상적인 활약에 힘입어 01-02 시즌, 03-04 시즌 세리에 A 준우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특히 03-04 시즌에는 토티가 20골, 카사노가 14골을 넣으며 리그에서 총 34골을 합작했다.[3]

이후 토티는 24년 간의 선수 생활 중 빈첸조 몬텔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같은 레전드보다 카사노가 이들 중 가장 뛰어났다고 말한 바가 있다.[4]

하지만 플레이에서만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다른 외적인 모습에서도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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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넣을 때마다 항상 이 짓거리를 했다. 얼마나 인지도가 높았으면 오른쪽 사진의 마테야 케즈만도 따라했을 정도였다. 그가 경기 외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들은 거의 아드리아누에 필적했는데, 돌아온 탕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면 말 다할 정도로 별의별 웃기지도 않는 사건사고를 다 달고 다녔다. 문란한 여자관계는 물론, 평생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폭식을 비롯해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한다. 카펠로 감독이 떠난 이후 그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고, 이후 후임 감독들과도 번번히 다투었다.[5]

그러다가 자신의 클래스에 비해 주급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구단주에게 돈 더 달라고 징징대다가 결국 레알로 이적하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토티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6] 보통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알고 있으나 사실은...카사노는 토티와 함께 리그를 정복하는 활약을 하고 있었는데 AS 로마의 전 구단주 로젤라 센시는 재계약 협상에서 그런 카사노에게 연봉 동결을 제시한다. 카사노는 연봉 0.4M(한화 약 7억)을 인상한 금액을 끝까지 요구했으나 센시의 제의는 동결or 인상하고 2년이었다. 2년 계약은 그냥 자유계약 내주지 않고 비싸게 팔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마지막 협상까지 최고의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연봉 7억을 올려주지 못한 센시는 카사노를 5.5M(한화 약 90억)의 이적료에 팔아야 했다. 사올 때는 25M 이상에다 가에타노 다고스티노까지 얹어준 선수를 말이다.[7]

1.3.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에서의 활약은 좋지 못했다. 일단 카사노 본인의 똘끼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카사노를 어쩌지 못하던 레알은 카사노의 은사인 파비오 카펠로가 레알에 부임하게 되며 은근히 카사노 제어도 좀 잘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펠로마저도 카사노와 다퉜다. 카사노는 카펠로에게 개기다가 징계를 받기도 하고 카펠로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면서 뒷담을 까는 장면이 방송국에 찍히는 등 갖은 추태를 부리다 체중증가량당 벌금이라는 굴욕적 조치마저 당하게 된다. 이 와중에 카사노는 다시 로마와 토티에게 징징 잉잉 불쌍한 척을 했으나 로마와 토티는 본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여러 모로 구단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짓만 하다가 시즌 도중 삼프도리아 임대를 가게 되고 결국 2008년 삼프도리아에 정식으로 이적하게 된다. 이후 2021년 1월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누텔라의 스폰서를 받았는데, 입단하자마자 12kg을 뺀 상황에서 누텔라를 먹고 7개월 동안 14kg가 증가했다고 한다.

1.4. UC 삼프도리아

삼프도리아 이적 후 그동안의 난잡한 여성 편력을 완전히 청산하고 수구(水球) 선수 출신 카롤리나[8]와 결혼하는데, 그 이후로 사람이 확 달라졌다. 삼프도리아의 공격수 잠파올로 파치니와의 콤비플레이는 전성기 토티와의 플레이에는 못 미쳐도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었고, 카사노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삼프도리아의 플레이 또한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의 기량을 보여주며 아직 클래스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거의 개인의 활약으로 삼프도리아를 챔스까지 진출시킨다. 챔스 진출 컷라인인 리그 4위로 리그가 마감되고 나서 삼프도리아 팬들은 챔스 우승한 것 마냥 좋아했고 카사노는 삼프도리아의 대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뜬금없이 구단주와 불화가 생겨 팀에서 완전히 내쫓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삼프도리아의 가로네 구단주가 어느 날 카사노에게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의했는데, 마침 그날 가족과의 약속이 잡혀 있었던 카사노는 그 제안을 잘라서 거절했다. 그러자 그 이후부터 가로네 회장은 카사노의 주급을 반토막냄과 동시에 그를 파치니 같은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폄훼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카사노는 2번이나 가로네 회장에게 사과했지만 가로네 회장은 결국 그를 방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는 없다면서 카사노는 그동안 그의 똘끼를 잘 알던 팬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손발 다 들어 구단주에게 빌었다. 심지어 주급은 깎아도 된다느니, 원한다면 휘발유도 마시겠다느니라고까지 하면서 빌었다.[9]

결국 2011년 1월 2일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또한, 삼프도리아는 카사노와 파치니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보낸 대가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1.5. AC 밀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국 밀란으로 이적이 성사되었다. 밀란 입장에선 계속 폼이 떨어지는 클라렌스 셰도르프, 호나우지뉴와 점점 늙어가는 피를로를 대신하여 창의적인 플레이를 해줄 수 있는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카사노의 영입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밀란에는 저 셋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볼 배급을 해줄 선수들이 없다. 마시모 암브로시니, 젠나로 가투소, 마티유 플라미니 모두 거의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선수들이다. 그렇기에 선수 생활의 절정기에 다다른 카사노의 영입은 밀란의 천군만마가 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첫째는 카사노는 이미 삼프도리아 소속으로 챔스를 뛰어서 밀란 소속으로 챔스를 뛰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 둘째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또라이 같은 멘탈이다. 물론 카사노의 멘탈이 전과 달리 매우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람 성격이 한순간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점이 약간 걸리는 점이기도 하다. 이적 후 맞이하는 첫 경기인 칼리아리전에서 후반 교체 투입된 후 어시스트를 올리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후에도 즐라탄과 찰떡 콤비를 보이며 리그에서 총합 40분 뛰었는데 3어시를 찍는 등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일명 갓산호. 특히 카사노와 즐라탄이란 창의력 대장들이 합쳐서 내는 공격진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그러다, AS 로마전 이후 원인불명으로 쓰려져 병원에 입원하여 검사를 받았다. 이에 대해 AC 밀란의 팀 닥터는 "카사노의 상태가 좋지 않다. 말을 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말하였다고 하면 꽤나 심각해 보인다. 안... 안 돼 뇌경색이라는 보도도 나왔었지만 AC 밀란 측에서 부정했다.

후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고 하며 이를 위해 수술에 들어간다고 한다. 몇 개월간의 재활이 필요한 상황으로, 시즌 아웃될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그래서 AC 밀란은 카사노의 대체자를 급하게 물색하였고, 이 때문에 테베즈 영입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테베스 영입이 무산된 시점에서 생각보다 회복이 빨라 이내 개인훈련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떴다. 본인은 4월 복귀를 희망하지만, 의사는 6월쯤은 되어야 한다고 전망하고 있다.

피오렌티나전에서 교체 출전하였다. 하지만 팀은 지고 말았고 선두까지 유벤투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도 이후 경기 출전하면서 점점 기량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새 국가대표 팀 감독 체사레 프란델리에 의해 이탈리아 대표팀에 발탁되어 UEFA 유로 2012에서도 활약했다.[10] 스페인전에서도 비록 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클래스는 죽지 않았다는 듯이 스페인의 수비진을 적절히 뒤흔들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선수들의 공격 기회를 만들어주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아, 반대로 멘탈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 발로텔리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줬다. 그리고 2차전을 지나 결국 3차전, 전반 35분에 세트피스 상황에서 피를로가 어시스트해준 공을 백헤딩으로 넣어 이탈리아의 선제골을 기록하는 데 성공해[11], 이탈리아의 8강 진출을 견인한 주역의 한 명이 되었다.

이어서 8강전에서는 조용했으나, 준결승전에서 독일 수비수 2명을 농락하는 턴 직후에 정교한 크로스를 날려 발로텔리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이탈리아 팀이 우승후보로까지 꼽히던 독일을 2:1로 완파하는 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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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전 끝나고 팬들한테 상/하의 벗어서 주는 장면이었다.(왼쪽 사진)

다만, 아직까진 '60분짜리 공격수'(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풀타임 출장이 힘들어서)라느니, 발로텔리와 함께 멘탈과 기복있는 경기력 때문에 언제 팀을 말아먹을지 모르는 '폭탄'이란 평이 남아있는 등 우려도 남아있었고, 불행히도 하필 결승전에서, 이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본인도 스페인의 파상공세에 휩쓸려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12], 특히 풀타임 출장이 어려웠던 탓에 항상 교체 카드 1장을 잡아먹고 시작하던 것인데 되려 이게 이탈리아쪽에선 평소에 비해서 너무 큰 악수로 작용했다. 전반전때 부상으로 첫번째로 교체된 키엘리니 이후 카사노는 체력 부족과 부진했던 탓에 2번째 교체카드로 디 나탈레랑 교체됐지만 디 나탈레도 부진했고 후반 11분 마지막 교체카드로 티아고 모따를 투입했지만 이후 수비진들이 줄줄이 부상당하며 이미 교체카드를 다 써버린데다가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사실상 몇명이 없는 상태로 뛰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13]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폭탄'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대회 전의 부정적인 예상에 비하면 훨씬 많은 활약을 보여준 셈. 결국 유로 2012는 그의 대표팀 커리어 중 최고의 전성기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대회 종료 후, 이적설이 나왔다. 이제 나이도 나이이고 해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아내의 고향 팀인 제노아에서 보내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밀란도 그를 정리하고 제노아에서 마티아 데스트로 등의 유망주를 데려오고 싶어하며, 또한 제노아와 밀란의 관계가 좋은 것 등이 이번 이적설에 힘을 실어 넣어주고 있었다

1.6.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12년 8월 22일 인테르 잠파올로 파치니와의 트레이드로 인테르로 이적했다. 정확히는 카사노 + 7M 유로와 지암파올로 파치니의 트레이드.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트레이드라는 반응이 많다. 파치니가 분명 나쁘지 않은 공격수이기는 하지만 카사노에 비해서는 리그나 국가대표에서의 활약상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카사노에 7M 유로를 더 얹어줬으니. 이 트레이드의 배경으로는 2012년 여름 이적 시장 동안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치아구 시우바 등 고액 주급자들을 처리해온 AC 밀란의 행보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로써 카사노는 2012년부터는 네라주리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과거 카사노의 중거리 슛 때문에 챔스 진출 좌절을 맛봤던 인테르였기에, 다소 묘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로쏘네리 팬들에게는 심장병 재활 때까지 기다려줬더니 홀랑 라이벌 팀으로 이적했다면서 그를 이적시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세트로 온갖 욕을 처먹게 된다.

평소 인테리스타였던 카사노는 입단식에서 "밀란 위엔 하늘만 있다. 그리고 하늘 위엔 인테르가 있다."란 인터뷰로 많은 환영을 받았다.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체력에 한계가 오고 부상도 겹쳤다. 그럼에도 36경기(29선발 7교체) 8골 12도움이란 기록을 남겼는데, 팀이 전체적으로 부상으로 시망하는 가운데 그나마 공격 루트를 만들어내던 선수였다.

그러나 시즌 후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마짜리가 카사노를 쓰지 않을 것을 천명하여 결국 FC 파르마로 이적했다. 이에 카사노는 "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마짜리는 아니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마짜리에게 계속 안 좋은 감정을 드러냈는데 마침 마짜리가 인테르에서 무재배하면서 유망주는 쓰지도 않자 '역시 인테리스타'라며 환호를 받았던 건 함정...

1.7. 파르마 FC

노장은 죽지 않았다.

82년생이므로 이제 30줄을 넘긴 선수임에도 루카 토니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노장은 왕창 모았는데 다 별로인 AC 밀란은 뭐했는가 세리에A 34라운드 종료기준 11골 6어시스트로 활약하고 있으며, 그 활약을 디딤돌삼아 국대 승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평소에 인터뷰라면 자뻑 내지 이상한 소리가 대부분이던 젊은 시절과 대비되게 "살을 뺐다고 해서 대표팀 멤버에 뽑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체사레 프란델리 대표팀 감독님께서 살을 뺀 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까 싶다. 만약 월드컵에 간다면 난 행복할 것이다"라는 매우 겸손한 인터뷰를 남겼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에도 나와 있듯 과식의 상징인 그가 무려 체중 감량까지하며 욕이란 욕만 골라 먹던 그가 선수로써는 황혼의 나이에 갑자기 멋진 모습을 보여주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후 월드컵에 출전하지만 코스타리카전에서는 아무것도 못했다. 코스타리카의 압박 때문이라고는 해도,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듯한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다.

한편 14-15 시즌에는 그럭저럭 활약은 하였으나 구단 매각이 풀리지 않아 연봉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생겨 구단과 트러블이 생긴 듯하다. 결국 1월 27일자로 자유 계약 상태가 되었다.

1.8. 무직 기간

오스발도가 떠난 자리에 카사노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이 되었으나 인테르의 만치니 감독이 자유 계약 신분인 카사노의 영입을 거절하며 인테르 이적은 무산되었다.

1.9. 삼프도리아 2기

무적 신분으로 팀이 없었던 카사노는 2015년 8월 9일 삼프도리아와 2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15-16 시즌엔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25경기 출전 2골 5도움을 기록했다. 별 사고 없이 지내나 했지만 시즌 막판 제노아와의 더비 매치에서 3대0으로 완패한 후 구단 회장 대리인과 충돌하며 계약 해지 직전까지 갈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방출은 안 됐지만 이탈리아 언론들은 여전히 카사노의 방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후 16-17 시즌에는 페레로 회장과 불화설이 생겼고 더 높은 주급을 요구하면서 결국 페레로 회장과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페레로 회장은 "카사노는 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남아서 훈련하는 척 하면서 모두의 동정을 유발하려고 한다. 제물이 되는 어린양이 되는 길은 카사노가 선택했다. 그는 자신을 위대한 축구 선수라고 착각하는 듯 하다."라며 공개 인터뷰에서 비난하며 카사노에게 라커룸 출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2017년 1월 구단에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조만간 삼프도리아를 떠날 것이 확실해보인다.

2017년 2월 삼프도리아를 떠나게 되었다. 차기 행선지로는 중국 리그 등이 점쳐지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10. 엘라스 베로나, 그리고 은퇴 선언

선수 생활의 끝까지 이어지는 똘끼, 그리고 그 수혜자는 뜻밖에도 이승우.

2월 15일 디마르지오와의 인터뷰에서 은퇴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중국이나 아르헨티나 리그로는 떠나고 싶지 않으며 세리에에서 뛰고 싶다. 6월까지 불러주는 팀이 없다면 집에 머물고 싶다."라고 말했다.

2월 27일 '스카이 이탈리아'에서 카사노가 몇몇 세리에 A, B의 오퍼를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본인은 세리에 A 중상위권 팀에서 뛰고싶은 모양이지만 세리에 A 중상위권 팀은 모두 확실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공격수를 갖고 있어 과연 오퍼가 들어올지는 의문이다.

파일:카사노_베로나.jpg
7월 11일 엘라스 베로나로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99번.

그러나 프리시즌 훈련에 합류한지 8일째, 7월 18일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가족들이 보고싶고 집에 가고 싶어서 은퇴를 한다는 보도였다.

오후에 기자회견에 등장한 카사노는 무적기간동안 쭉 가족들과 지내하다 프리시즌 캠프에 합류해 가족과 떨어져 정신적으로 힘들었으며 충동적으로 은퇴를 이야기했다고 밝히며 다시 디렉터와 대화를 통해 해결했으며 은퇴는 없다고 밝혔다.

7월 24일 카사노가 다시 은퇴를 결심했다고 이탈리아 유력 기자인 디 마르지오가 보도했다.

곧 아내의 SNS계정을 통해 은퇴는 아니며 단지 베로나와 함께하기 싫어서 나가는것이라고 밝혔다. 당연히 베로나 보드진은 크게 반발했으며 계약해지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다시 몇시간 뒤 공식 성명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아내의 SNS로 밝힌 내용은 아내의 실수이며 본인은 이제 축구를 그만 둘 것이며 베로나의 관계자, 동료들, 팬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은퇴함을 밝혔다.

그런데 7월 31일 아직 은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또다시 은퇴 번복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어쨌거나 카사노가 팀을 이탈하자 베로나 측은 부족한 공격 자원수를 이승우의 입단으로 메꾼다.

1.11. 그 이후

2018년 1월 다시 은퇴번복을 했다. SPAL에서 현역 복귀한다는 루머가 있었다. 이적시장이 닫혔지만 FA 신분이라 언제든 복귀는 가능한 상황.[14]

결국 17/18 시즌 내에 팀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2018년 10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는 주로 축구 토크쇼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 못지않은 노빠꾸 입담 때문에 이탈리아 현지에선 인기가 상당한듯. 완다 이카르디[15]의 발언에 벙쪄서 팩트폭력을 날린 적도 있다. 그 기행으로 유명한 카사노조차 완다한테 한소리를 날린다는 것은 완다가 상상 이상으로 막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제 무리뉴를 신나게 까고 있는데 무리뉴는 1년 넘도록 무시하다가 끝없이 까대자 마침내 폭발하는지 철저하게 디스했다.
누구에게나 호불호가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 카사노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떠들어 대는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우리 중에 몇몇은 여전히 축구계에서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카사노? 그는 그저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 보자, 카사노가 어느 팀에서 뛰었나?
그나마 알아주는 팀이라면 레알 마드리드. 로마, 그리고 인테르에서 뛰었지.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카사노에 대해 기억하는것 있나? 사람들이 기억하는건 그의 입단식 재킷 뿐이다.
로마 시절?
로마는 카사노가 뛰지 않은 경기에서 수페르코파를 우승해냈지.
인테르에서의 카사노에 대해 말해보자,
인테르에서 그는 심지어 친선매치 우승인 롬바르디아 컵조차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주제 무리뉴라는 사람이 레알 마드리드, 로마, 인테르에서 무엇을 이루어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는 굳이 없을 것이다.
카사노, 그는 나를 보면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지.
근데 나는 걔한테 아무런 문제도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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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카사노의 친부는 카사노가 인기 스타가 되고 나서야 찾아왔고, 이에 격분한 카사노는 욕을 퍼부으며 그를 두들겨 패서 내쫓아버렸다. 다만 네이트에서 연재된 적이 있는 축구선수의 일대기를 다루는 웹툰인 오정현의 스타플레이어에서는 카사노 에피소드에서 저걸 대놓고 그리기는 좀 그랬는지 이 에피소드를 다룰 때 카사노의 친부를 두들겨 팬 건 카사노의 이웃들이 카사노의 친부의 뻔뻔함에 분노하여 구타한 것으로 나왔고 카사노 본인은 직접 패지는 않았지만 친부의 멱살을 잡고 두 번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각색했다. [2] 당시 수비수가 최상급의 수비수라 불리던 크리스티안 파누치 로랑 블랑이었고, 블랑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황금세대로 불렸던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우승 멤버였다. 파누치는 알다시피 이탈리아에서 설기현이 골을 넣기 전에 손에 볼이 맞은 선수다. [3] 토티는 이때 자신의 커리어 첫 번째 리그 20골 이상 득점에 성공했고, 이는 06-07 시즌을 제외하면 유일한 20골 이상 득점이다. 카사노는 이 시즌이 그의 선수 경력 중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시즌이다. 득점수에서도 이때가 최다골을 기록한 시즌이다. [4] 워낙 테크니션으로 뛰어났던 두 선수이기 때문에, 2선과 1선을 오가면서 창의적인 플레이들을 보여주는 플레이는 지금 영상으로 찾아봐도 눈이 즐겁다. [5] 재계약 조건 중에 카펠로 감독을 복직시켜달라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고 한다. [6] 당시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좋지는 않아도 나쁘지도 않은 그런 관계이다. 당시 이적하면서 절친이었던 토티에게 인사 한 마디 안 하고 가서 토티가 삐졌다고 한다. [7] 하지만 새 구단주 디 베네데토의 부임 이후 그냥 센시가 운영을 개떡같이 해서 돈이 없던것으로 드러났다. [8] 헌데 별명이 수구계의 젠나로 가투소였다고 한다. [9] 이번 사태에 대해 여러 네티즌들의 반응은, 물론 카사노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구단주가 쪼잔해서 그렇다는 것이 주된 평이었다. [10] 카사노가 발탁되자 많은 사람들이 심장수술받고 90분 경기도 못뛰는데다 성격도 개망나니인데 대표팀에 합류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11] 좀 애매하게 들어간 모양새였지만, 골라인 안으로 넘어간 것이 분명해서 골로 인정되었다. [12] 그래도 몇 번 날카로운 슈팅을 날리기도 했지만, 하필 상대가 카시야神였다. [13] 특히 이탈리아는 마지막 교체카드로 후반 11분 몬툴리보를 빼고 모따를 투입해 변화를 꾀한 이탈리아였지만 모따는 투입 5분만에 부상당하며 들것에 실려나갔다. 당연히 더 이상 교체카드가 없던 이탈리아는 10명으로 싸워야했다. [14] 대표적인 예로 맨유에서 뛰었던 골키퍼 안데르스 린데가르트, 당초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의 계약 만료 후 FA 신분이었으나 톰 히튼의 부상으로 대체자가 필요했던 번리 FC가 그를 시즌 중 영입했다. [15] 마우로 이카르디의 아내. 완다 이카르디의 화려한 행적에 대해선 마우로 이카르디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