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1년(중종 26) ~ 1597년(선조 30). 자는 덕호(德浩). 호는 동암(冬岩). 또는 동암처사(冬岩處士). 본관은 죽산(竹山).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이다.
증조부는 현감(縣監) 안범(安範), 부친은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 안수륜(安秀崙), 아버지는 남원부사 안축(安舳)이며, 어머니는 생원 김약회(金若晦)의 딸 도강김씨(道康金氏)이고, 부인은 별좌 원언보(元彦輔)의 딸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원천상(元天祥)[1]이다. 형은 안중관(安重寬)이고 동생은 안중돈(安重敦)이며, 조카가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이다.
성품이 또한 지극히 효성(孝誠)스러워, 어버이 병환(病患) 중에는 의복의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 상례(喪禮)에 정성(精誠)을 다했으며, 공경(恭敬)으로 3년 여묘(盧墓)살이를 했는데 그 동안 머리와 허리에 감는 질(絰)과 띠(帶)를 풀지 않았다.
효행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안방준(安邦俊)은 그의 저서 《은봉전서[2]》에서 " 원균(元均)은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3]의 처 원씨[4]의 친족이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 하였다. 중부께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적을 격파하는데 마음을 다하여 공업(功業)이 이순신보다 두드러질 수 있다면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갓 이순신을 갈아치운 것으로 통쾌히 여기면 어찌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하니, 원균이 대답하기를, 『나는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며, 육박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하고 칼이 부러지면 정(기름을 칠한 곤봉)으로 싸우니,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하였다. 중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기를, 『대장이 되어서 칼과 정을 사용하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하였다. 원균이 돌아가자, 중부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5]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했다.
[1]
《원주원씨세보(元州元氏世譜)》(1739)2권(pp.1下)와 《선원록(璿源錄)》<세종자손록(世宗子孫錄)> 정현옹주(貞顯翁主) 편
[2]
『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445d 「白沙論壬辰諸將士辨」
[3]
안중홍(安重洪,1531~1597)으로 세상사람들이 동암처사라 불렀다. 후에 효행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4]
원주원씨(原州元氏) 원천상(元天祥)이다. 그녀는 임진년(1532) 출생이며, 아버지는 원언보(元彦輔), 할아버지는 원익(元翊), 증조부는 원치(元菑)이며 외조부는 파평윤씨 윤현손(尹賢孫)이다.
[5]
조괄은 조나라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병법을 배워 병사에 대해 말하면서,『천하가 나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하니, 그의 아비 사(奢)가 일찍이 말하기를,『조나라 군대를 깨부술 자는 필시 괄일 것이다』하였다. 후에 염파(廉頗)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었으나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기병(奇兵)을 풀어 크게 격파하고 괄을 활을 쏘아 죽였다. 『사기(史記)』에서. 기겁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장수로 악의(樂毅)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었으나 제나라 장수 전단(田單)에게 크게 패하였다. 『전국책(戰國策)』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