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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4년 1월 4일 |
함경도
온성도호부 영달사[1] (現 함경북도 온성군 영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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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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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4년 1월 4일 함경도 온성도호부 영달사(現 함경북도 온성군 영강리)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30일 김창욱은 전창우(全昌禹)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건네 받았고, 전창우가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해달라는 부탁을 하자 이에 승낙했다. 이후 김창욱은 곧 안병손을 찾아와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자고 권유했고, 안병손은 이에 승낙했다.
이들은 이후 수차례 협의한 끝에 그해 4월 4일 영충면 회덕동 회동교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했고, 이어 대형 태극기 1개, 소형 태극기 35개를 제작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동지들을 포섭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오전, 250여 명의 시위대가 회동교에 모여 들자 곧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일으켰고, 영충면사무소를 지나 북창평동 장터를 향해 행진했다. 이때 급한 전보를 받은 북창평 헌병파견소에서는 즉시 일본군 헌병을 출동시켜 이를 해산하려고 했고,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인해 현장에서 5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후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은 취소되었으나, 징역 10개월형으로 형이 더 가중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