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9:56:40

안드레예프 이반 찌하노비치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안드레예프 이반 찌하노비치
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본명 안드레예프, 이반 찌하노비치
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출생 1884년
러시아 제국 피트로그라드 두비키
사망 1933년 (향년 49세)
중국 상하이
직업 군인, 경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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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찌하노비치.jpg

1. 생애 요약2. 1차 세계대전 참전3.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4. 안드레예프 주장의 특이점5.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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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요약

1921년 자유시참변, 1920년 니콜라옙스크 사건과 관련된 안드레예프 이반 찌하노비치(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는 1884년 러시아 피트라그라드 지방의 두비키 마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러시아로 귀화한 핀란드인이다.
안드레예프는 15년 정도 차르군대에서 군복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2. 1차 세계대전 참전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장교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가 되어 전선으로 보내졌다.
용감함을 대해 그는 두 개의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1917년 2월의 러시아 혁명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로 돌아와 그가 만든 시부치 어장에서 어업을 시작했다. 1918년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이 아무르강 하류를 점령하는 동안, 안드레예브가 포병 전문가로 니콜라옙스크 일대의 일본군 및 백파 군대에 동원되기 전까지는 어업에 계속 종사했다.

야코프 트랴피친(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의 파르티잔 부대가 1920년 2월경 니콜라옙스크를 막았을 때, 안드레예프는 백파 군대에서 파르티잔 편으로 귀순했다.
안드레예브는 파르티잔들이 1918년에 해체된 츠니르라흐 요새의 대포를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1920년 4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에서 퇴각한 안드레예브는 포병을 지휘한 후 암군 마리인스크 전선의 세르고 미하일로프스키 방면의 지휘관이 되었다.
안드레예브의 부대는 주로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 거주자로 구성되었다.
1920년 7월초 사할린주 께르비에서 반란을 일으켜 다수의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를 처형했다.

3.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

그리고 아무르주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했다.

안드레예브는 아무르주 자유시 혹은 스바보드니 라고도 불려지는 지역에 있다가 1921년부터 1922년경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사할린섬 북부로 도주하여 살았지만 그를 일본 요원 혹은 밀정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고 한다.

안드레예프는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에게는 일본에 협조한 '존경받는 러시아의 영웅'이었다.
1925년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1922년부터 1925년경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수할 무렵 그는 사할린섬 북부를 떠났다.
그리고 1933년경 중국 상하이에서 망명중 사망했다.

4. 안드레예프 주장의 특이점

특이하게도,
안드레예프는 러시아계 친일파들과는 달리 니콜라옙스크 사건 당시, 사할린주 니콜라옙스크의 주민 1만 5천여명이 대피했다고 주장했고,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5.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