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 | 1912년[1] 7월 23일 |
사망년월일 | 1981년 11월 7일 (향년 79세) |
국적 | 우루과이 |
출신지 | 불명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83cm | 72kg |
소속팀 |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FC (1931)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31-1947)[2] |
국가대표 | 21경기 / 7골 (1934-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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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2. 생애[3]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치오카는 1931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FC 소속으로 우루과이 축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는 원더러스 소속으로 오래 남지 못했는데 시즌 중에 나시오날로 이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더러스는 치오카를 나시오날로 떠나보냈음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한 반면 새 소속팀 나시오날은 준우승에 그쳤다. 이는 치오카의 아쉬움을 불러일으켰지만 나시오날로의 이적이 더 나은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는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나시오날은 1933년, 우루과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치오카가 은퇴하기 전까지 8차례 우승을 더 맛보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중 1939년부터 1943년까지는 리그 5연패를 달성했고 치오카 역시 팀의 핵심으로 큰 역할을 했다.
치오카는 1947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2.1.2. 국가대표
치오카는 소속팀 나시오날의 리그 우승과 득점왕 기록에 힘입어 1934년에 처음으로 하늘색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상대는 전통의 라이벌 아르헨티나.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2대2로 아르헨티나와 비겼고 치오카는 후반 13분, 데뷔골을 기록했다.이후 치오카는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3차례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했고 2차례의 우승과 1차례 준우승을 거뒀다.
치오카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총 21경기, 7골을 기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치오카는 기술과 득점력을 겸비한 포워드였다. 우아한 플레이로 나시오날 팬들로부터 왕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9회: 1933, 1934, 1939, 1940, 1941, 1942, 1943, 1946, 1947(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7회: 1931, 1935, 1936, 1937, 1938, 1944, 1945(클루브 나시오날 데 풋볼)
4.1.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2회: 1935, 1942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9
4.1.3. 개인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2회: 1934, 1936(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