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심여추(沈茹秋), 심용해(沈龍海) |
본관 | 청송 심씨[1] |
출생 | 1904년 4월 18일[2] |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제구리 (현 함경북도 길주군 합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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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0년 4월 4일 |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현 육도구 자택 (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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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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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심용철의 둘째 형이다.
2. 생애
심용해는 1904년 4월 18일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제구리(현 길주군 합포리)에서 아버지 심병연(沈秉淵, 1871. 4. 23 ~ ?)[3]과 어머니 성주 여씨(星州 呂氏, 1884. 8. 7 ~ ?)[4]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그는 1919년 고향을 떠나 친척의 도움으로 연길현에 있던 연길도립제이중학교(延吉道立第二中學校)[6]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1919년 3월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이 간도지역에도 전해졌다. 이에 간도지역에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3월 13일 용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3일 독립축하회가 끝나자 명동학교 학생 충렬대가 앞장서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가운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심용해는 이때 유기석·박관해(朴觀海) 등과 함께 충렬대에 참가하여 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학교 재학 중에 연길현을 근거지로 한 학생독립운동 단체인 충렬단(忠烈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3년, 심용해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장춘의 '대동일보(大同日報)' 기자가 되었다. 1924년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아나키즘 계열의 신문인 '국풍일보(國風日報)'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후 아나키즘에 뜻을 둔 그는 1925년 아나키스트 유기석의 소개로 베이징에 있는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그해 겨울 동지들과 함께 '고려청년'을 출판하였다.
이후 북경법정대학(北京法政大學)[7]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1928년 여름에는 간도 한인사회의 실태를 조사하여 《연변조사실록(延邊調査實錄)》을 저술한 뒤 「민성보(民聲報)」에 게재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연변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민족특별자치구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9년 가을 활동 거점을 만주로 옮겨 연길현 교섭공서(交涉公署) 도대부(道臺府)에서 근무하면서 김좌진과 교유하는 한편, 중국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인들에게 중국어를 교육시켰다. 또한 가난한 재만동포들을 도와주었으며, 토지소송에 대하여 상담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 4월 4일 오전 1시 길림성 연길현 육도구(六道溝)의 자택에서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괴한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심용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봉익공파-전서공 지백(之伯)파 21세 용(容) 항렬. 족보명은 심용중(沈容重).
[2]
청송심씨족보 2권 1535쪽에는 6월 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이후 심능숙(沈能淑)으로 개명했다.
[4]
여동률(呂東律)의 딸이다.
[5]
어머니 성주 여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
양천 허씨(1872 ~ 1899. 10. 24) 허경(許烱)의 딸은 슬하에 장남 심용만(沈容萬, 1895. 9. 23 ~ ?)을 둔 뒤 1899년 10월 24일 요절했다.
[6]
1915년 8월 16일 개교했으며, 현재는
연길시제1고급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7]
1927년 폐교되어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에 합병되었는데, 경사대학당은 곧
베이징대학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