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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 1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6년 1월 6일 |
함경남도
갑산군 산남면 상리[1] (현 량강도 풍서군 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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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향년 불명) |
본관 | 청송 심씨[2]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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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심계월은 1916년 1월 6일 함경남도 갑산군 산남면 상리(현 량강도 풍서군 상리)에서 아버지 심창제(沈昌濟, 1897. 4. 9 ~ ?)[3]와 어머니 김해 김씨(1894. 12. 15 ~ ?) 김경삼(金京三)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삼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원잠종제조강습소(咸興原蠶種製造講習所)에 입소했다가 도중 퇴소하였다.그 뒤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문화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5동)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재학하였다. 1929년 9월 학교 입학 이후 교내 독서회를 조직하여 9월 30일까지 토요일마다 세 차례에 걸쳐 회의를 하고, 그 주간에 연구한 것을 상호 발표 비판하면서 의식수준의 향상을 도모하는 등 신사상 연구와 동지 규합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3년 1월경 학우인 이분성(李粉星)의 소개로 이재유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1934년 5월 김월옥(金月玉), 이현우(李鉉雨)와 만나 ' 코민테른 제13회 테제'를 지침으로 한 공산주의 활동에 더욱 진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6월부터 김명식(金明植), 이인행(李仁行) 등을 만나 사상사건으로 도피 중인 동지들에 대한 자금과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의 협의를 나누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위 '조선 용산노동조합(龍山勞動組合)' 활동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같은 해 8월 이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방조, 범인장닉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36년 7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 250일 통산)을 선고받고 다음날인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37년 11월 22일 출옥한 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고, 다만 청송심씨족보에는 북한에 있다고만 기재되어 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심계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중리와 함께
청송 심씨 집성촌이다.
[2]
봉익공파-정랑공 지포(之浦)파 22세 경(敬) 항렬. 본인은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6명의 남동생들 모두 심경■(沈敬■)으로 모두 항렬자를 썼다.
[3]
함경남도 갑산군 지역 유지이다. 1923년
주식회사
공흥(共興)에
대주주로 있었으며 1926년 주식회사 삼수양조 이사를
역임했다. 1937년에는
합명회사 미츠보시상사 사원으로
있었고, 같은 해 5월 10일 함경남도 도평의원에
당선되었다. 또한 1935년 11월 24일, 3년에 걸친 이상한파로 농작물 피해를 지속적으로 보던 갑산군 산남면 일대 농민 430호를 위해
주민세 200원 48전을 대납해주는 등
자선가의 면모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