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덕초(德肖) |
본관 | 아주 신씨[1] |
출생 | 1885년 10월 5일 |
경상도
의성현 금뢰면 구미동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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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6년 4월 1일[4] |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 절골마을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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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5년 10월 5일 경상도 의성현 금뢰면 구미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서 아버지 신석우(申錫禹, 1866. 11. 16 ~ 1916. 1. 20)와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1862 ~ 1900. 5. 6)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자식 없이 요절한 큰아버지 신석규(申錫圭, 1861 ~ 1878. 9. 6)에 입양되었으며, 의성군 조문면 초전동(현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부인은 광산 김씨이다.그는 1919년 3월 12일 조문면 대리동 교회에서 앞선 3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교회 목사 박낙현과 대구동산성경학교 학생 윤영주(尹營柱)가 대구부에서 열린 만세운동의 정황을 설명하고, 또한 의성군에서도 오는 3월 18일 의성면 읍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자, 이에 참여한 뒤 거사 당일에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고 참여할 사람들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거사 전날인 3월 17일 일본 경찰에 의해 만세운동 계획이 미리 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의성면 읍내로 나가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같은 해 4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긴 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어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2일 상고까지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6년 4월 1일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