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희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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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5년 | |
이름 | 신영희 | |
분야 | 전통예술 | |
화관문화훈장(5등급) |
한국방송대상 | ||||
국악인상 | ||||
신영희 (1999년) |
연기부문 특별상 | ||||
제22회 (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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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희 (사랑보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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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희 申英姬 / Young-Hee Sh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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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2년 2월 6일 ([age(1942-02-06)]세) |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 |
소속사 | MASTER ENTERTAINMENT[1] |
수훈 | 화관문화훈장 (2005년 수여) |
약력 |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사)만정김소희판소리선양회 이사장 (사)남도민요보존회 이사장 |
아호 | 계정(繼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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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은 재주의 주인이요, 재주는 덕의 종이다."
대한민국의 국악인, 인간문화재. 현재 국가무형유산 판소리(춘향가) 보유자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창(國唱)이다.
2. 경력 및 평가
전라남도 진도군 출생으로 어릴 때[2] 부친(신치선)으로부터 판소리를 익혔다. 이후 목포에서 거주하며 여러 스승들에게 소리를 학습하던 중 우연히 목포로 공연을 온 만정 김소희의 권유로 서울로 상경하여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1970년대 중반에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였으며, 1977년에 남원 춘향제 명창부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1992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되었고, 2013년 스승 김소희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3] 제5호 판소리 춘향가(만정제)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민속학자 이윤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소희에게 동문수학하던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 세 사람을 가리켜 삼걸(三傑)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김소희,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 <남도민요 ‘농부가’,’자진 농부가’>(1975년) |
신영희, 안향련 - 창극 ‘춘향전’(1979년) |
국악학자 권오성은 '판소리를 하기 좋은 성음을 타고난 이'로 한농선, 신영희, 전정민을 꼽았는데 신영희의 대표적 성음은 통성(배 속에서 바로 위로 뽑아내는 목소리)과 수리성(쉰 목소리와 비슷한 껄껄한 음색의 묵직한 성음)으로, 판소리의 가장 깊은 특징을 잘 표현해내는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저음에서 다양한 기교 구사에 특히 능하며, 상성을 낼 때의 기교 또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좋고, 중앙성으로 멋있게 마무리하는 솜씨가 탁월하며 소리가 뱃속 깊은 곳에서 나와 울림이 강하기 때문에 흔히 대통 속에서 나오는 성음을 지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마이크도 없이 3000명이 모인 강당에서 소리하여 좌중을 압도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공연도 있었다.
무릇 판소리 명창의 성음이 어찌하여야 품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자고로 되바라진 소리보다 중후한 성음을 더 쳐 주었다. 모르는 이들은 흔히 된 소리로 야들야들 간드러지는 소리가 매력이 있다고 하지만, 진짜 소리를 아는 귀명창들은 이런 소리는 '쇄납소리'라 하여 격이 떨어지는 소리로 꼽는다. 그래서 자고로 양성으로 된 소리를 내는 것보다 수리성으로 깊은 소리를 내는 것을 판소리 명창의 좋은 목 자질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영희 명창이 그런 태산과 같은 중후한 성음을 지니었기로 품격이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성음을 얻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판소리 득음이라는 것이 수많은 학습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력의 결정체라 하지 않던가? 어느 판소리 명창치고 쉽게 득음한 적이 있으랴 마는 신영희 명창이 학습한 내력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눈물겹다. 부친 신치선 명창에게 6년간이라는 긴 세월에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를 배운 때가 소꿉질하고 놀 11살 어린 나이라 한다. 그리고 안기선 명창에게 3년간 적벽가, 춘향가를 배울 때가 한창 뛰어놀며 호들갑을 떨 나이 14세라 한다. 어린 시절을 다 바친 것이다."
- 국악학자 이보형 (춘향가 음반에 실린 ‘신영희 명창론’ 中)
신영희 명창이 그런 태산과 같은 중후한 성음을 지니었기로 품격이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성음을 얻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판소리 득음이라는 것이 수많은 학습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력의 결정체라 하지 않던가? 어느 판소리 명창치고 쉽게 득음한 적이 있으랴 마는 신영희 명창이 학습한 내력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눈물겹다. 부친 신치선 명창에게 6년간이라는 긴 세월에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를 배운 때가 소꿉질하고 놀 11살 어린 나이라 한다. 그리고 안기선 명창에게 3년간 적벽가, 춘향가를 배울 때가 한창 뛰어놀며 호들갑을 떨 나이 14세라 한다. 어린 시절을 다 바친 것이다."
- 국악학자 이보형 (춘향가 음반에 실린 ‘신영희 명창론’ 中)
판소리 ‘춘향가’ 중 춘향 모친 통곡하는 대목 - 2011년, 당시 70세의 신영희 대명창(KBS 국악한마당) |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이 생겨난 이후 김소희, 박록주, 박초월 명창 등이 1세대 여류명창이라면, 신영희는 성우향, 성창순, 남해성, 박송희, 오정숙, 한농선 등과 함께 2세대 여류명창 중 마지막 생존한 판소리계 최고 원로 명창으로 평가 받는다.
신영희의 가장 대표적인 무릎제자[4]로는 이주은[5], 조수황 등이 있다.
3. 상훈
1963년 아세아민속예술제 창악부 최우수상1976년 제4회 남원 전국국악명창대회 명창부 대상
1986년 제22회 백상예술대상 연기부문 특별상
1997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국악공로상
1999년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
2005년 우리것보존협회 자랑스러운 명인 판소리부문 대상
2005년 한국예술실연자대상 국악부문
2005년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2007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2015년 제25회 동리대상
2019년 제26회 방일영국악상
4. 방송 활동
1988년~1990년까지 KBS 《 쇼 비디오 자키》에서 방영된 김한국, 김미화 주연의 인기 코메디 프로 ‘ 쓰리랑 부부’ 에 출연하여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 프로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라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에도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하여 현재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국악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2021년에는 MBN에서 방영한 < 조선판스타>에서 고정 패널이자 심사위원장으로 활약하며 거침없는 재담으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면서도, 정확하고 예리한 심사평으로 국악계 거장으로서 카리스마와 진면목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