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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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 신라와 태봉의 관계. 태봉의 궁예 정권이 왕건에 의해 타도당하고 고려 국호가 918년에 회복되었을 때까지 관계가 있었다.2. 역사
그야말로 최악. 견훤의 후백제와 신라의 관계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견훤은 889년 거병 당시부터 900년 후백제 건국까지 11여 년 간 표면적으로나마 자신이 신라에 소속되어 있다고 표현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견훤이 892년 무진주 점령 이후 자칭한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그 뜻을 간단히 풀어보자면 ‘신라의 신하 겸 독자적인 왕’ 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위상을 인식한 견훤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906년까지는 원신라 영역을 탈취한 적은 없었으며, 906~907년에 얻은 원신라 영역인 경북 서남부 추풍령 일대는 태봉한테서 빼앗은 영토였다.
그에 반해 궁예는 태봉 건국 직후, 901년 경 남쪽으로 순행하는 도중, 흥주, 즉 현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에 있던 신라 왕의 어진을 칼로 난도질 하는 등 신라를 향한 증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궁예의 출생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어쨌거나 신라 출신은 맞다. 그리고 경문왕 왕자설을 따른다면, 신라와 태봉이 관계가 안 좋은 이유에는 궁예의 사적인 감정도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태봉은 외교 문서에서 신라를 ‘멸도’라고 불렀다. ‘멸도’ 는 멸망한 곳 비슷한 느낌으로, 국가로 안 치겠다는 스탠스였다.[1] 거기다가 신라에서 넘어오는 귀화자들을 모두 죽여버렸다고 한다.[2] 이렇게 적대적이였던 만큼, 두 나라의 교류는 없었다.
당연한 얘기로 태봉은 원신라 영역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건국한지 불과 4년만인 904년에 오늘날 경북 서부 전체를 제패하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신라가 태봉군을 물리친 적도 있지만 경북 동부를 고수해내는 데 그쳤다. 오히려 906~907년에 후백제에게 경북 서남부를 빼앗기게 되면서 대신라 공세는 둔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견훤은 원신라 영역을 탈취한 역적이라는 부담도 덜 수 있었다.[3] 또한 이때 태봉이 얻은 경북 서북부 영역은 왕건의 고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왕건은 원신라 영역에 대한 점유는 가급적 삼간 편이어서 서라벌 함락 이전까지 신라가 여력이 있을 때는 경북 동부 진출은 삼갔지만, 경북 서북부만은 태봉에게서 상속받은 영역으로서 대놓고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 훗날 왕건이 신라 왕실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후백제를 견제할 수 있었던 건, 대신라 적대 정책을 취해 태봉이 얻어낸 영역들 덕택이었다.
한편 이렇듯 신라와의 전쟁을 지속하면서도 유긍순, 홍기, 긍준 등 여러 호족들을 제압하고 심지어 나주 공방전에서 승리한 궁예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건과 견훤 좋은 일만 해준 게 되었다.
3. 같이 보기
[1]
비슷한 예로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혀 있는
백제의 잔당이라는 뜻의 ‘백잔’이 있다.
[2]
경문왕의 사생아설을 채택한
태조 왕건에서도
궁예가 군사훈련에서 미덥지 않은 모습을 보인 병사들이 신라 출신 투항병들임을 알자 즉시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3]
신라는 그러든말든 초지일관 견훤을 역적 취급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