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여(申禹汝) | |
본명 | 신대필(申大弼) |
본관 | 평산신씨 한성판윤공파 32세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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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본명은 신대필이며 평산신씨 한성판윤공파 32세 후손이고 본적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으로 신대필의 부친은 대한제국 의병의 기병이였다.신대필의 모친은 순흥안씨로 신대필은 5남3녀 중 셋째로 태여나 19세기 90년대 초반에 조부모와 부모형제들과 같이 두만강하류인 조-중-러시아 국경지역인 2차 세계대전 원동 장고봉전투 근처의 시골 마을에 이주해서 생활했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안중근이 편성한 항일무장단체 의병에 입대하여 1908년6우러부터 시작된 경흥군 로면전투와 홍의동전투 그리고 경흥 신아산 전투와 경흥 회령전투 등 항일무장단체전투에 참전하였다. 안중군 하얼빈의거후에도 전역군인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 해왔다.
1919년 3월28일 리하영을 비롯한 4000여명이 참석한 3.1운동을 소집하였고 반일연설을 통해 민족주의 활동과 더불어 러시아로 오가면서 블라디보스또크에서 김규면이 조직한 신민단에 참가하여 훈춘지부 군사부(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지역)에 한경세, 리승조와 같이 활동하면서 문창범, 리동휘 등이 활동하는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3월부터 6월사이 홍범도 최진동 장군의 지휘하에 온성군 진입전투에 참전히였다.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1년 연해주 추풍당 어현동의 솔밭관에서 적군 백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922년 3월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 서부사령관으로 임명되였으며 5-60대 의병을 조직하여 1922년 6월에 200여 일본군과 격전하여 40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였고 그 뒤로 그라데꼬보와 한까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활동을 해왔다.
1922년말 쏘련군이 조선인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하자 4년만에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금당촌으로 부모처자를 찾으러 갔으나 경신년 일제 토벌로 인해 생활했던 집은 불에 타서 재더미가 되였고 가족들은 이미 산너머 로령 추풍 농평촌으로 떠나고 없었다.
수소문거쳐 다시 연추로 가서 가족들과 상봉하였으나 전투중에 부상을 입은데다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1926년 3월26일 4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시대의 광복절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으나 자녀와 직계후손은 1990년대 초반 만났을시 한국어를 못하는 사람들로 러시아 언어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