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08:34:53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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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성스치 암살 사건3.2. 성스차이와 국민정부의 결탁3.3. 국민정부의 대응3.4. 소련의 철수
4. 결과5. 참고 문헌

1. 개요

1942년 9월 17일 신강성의 지배자 성스차이 소련 중국공산당과의 우호관계를 파기하고 신강성 정부에 파견 온 마오쩌민을 비롯한 공산당원 2백여 명을 체포한 사건.

2. 배경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나 신강성 독판 진수런이 축출되자 신강성의 군벌 성스차이가 새로운 신강성 독판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신강성은 위구르족의 반란과 감숙성의 군벌 마중잉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해 있었다. 1934년 1월 마중잉이 신강성의 성도 디화를 포위하자 성스차이는 소련과 협상하여 소련군 1개 여단을 지원받아 마중잉을 격퇴하고 소련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성스차이는 신강성은 공산당의 땅도 국민당의 땅도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발언하면서 신강성에 반쯤 독립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성스차이는 소련에 더욱 접근하여 1938년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섬서성의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여 신강성을 중국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통로로 제공하였으며 마오쩌민을 비롯한 여러 공산당 고문들을 초빙하였고 1941년 1월에는 신강을 중국에서 분리하여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을 세우자고 소련에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스차이는 군벌들 중에서 공산주의에 좀 친화적이었을 뿐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중국공산당과는 알게 모르게 적대하는 사이었다. 게다가 소련에서 유학한 넷째 동생 성스치(盛世騏)가 공산당원이 아닐까 의심하고 성스치의 좌경 사상과 충돌하는 등 그리 좌익적인 인물이 아님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 중공은 조차조약 협상에 관해 소련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등 성스차이에게 공산당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성스차이는 그런 요구를 탐탁지 않아 했다.

거기다가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어 소련이 파시즘 국가의 끝판왕인 나치 독일과 준동맹 상태가 되자 성스차이는 크게 당황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성스차이는 소련과 손잡은 것이 실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성스차이는 측근들에게 소련이 독일에게 패할 가능성이 높고 소련이 어찌어찌 이긴다고 하더라도 전후 피해를 복구하느라 더 이상 신강성에 지원을 해 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소련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다.

3. 전개

3.1. 성스치 암살 사건

1942년 4월 12일 성스차이가 암살될 뻔했지만 미수로 그치고 넷째 동생 성스치가 암살되는 4.12 폭동이 발생하였다. 암살을 모면한 성스차이는 소련이 배후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스차이는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원과 소련인 300여명을 체포한 후 소련의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신강영사 바쿠린과 군사총참사 라토프가 성스치를 암살하고 자신의 정권을 전복하려고 했다고 격렬히 항의했다. 하지만 몰로토프는 성스차이와 성스치 사이의 권력투쟁의 결과로 성스치가 죽었을 뿐이라며 항의를 씹어 버렸다. 사실 훗날 국민정부조차 성스치의 죽음의 배후에는 성스차이가 있다고 여길 정도로 성스차이가 당시 수상쩍었던 건 사실이었다.

확실한 것은 성스차이가 1937년 니야 호자즈가 국민정부와 결탁하여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고 구실을 잡아 위구르족 지도자들을 숙청한 것처럼 소련이 성스치를 암살했다고 소련과 관계를 끊고 신강성에서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세력을 제거할 좋은 구실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성스차이는 차차 소련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장제스는 5월 17일 일기에 "성스차이의 사상과 심리상태는 확실히 이미 변화했다.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고 기술했다.

3.2. 성스차이와 국민정부의 결탁

7월 7일에 성스차이는 자신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음을 실토하면서 이를 반성하는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다.
저는 원래 마르크스주의를 신앙하였고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의 집행자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저는 국가와 민족을 지지하기 때문에 제가 신강성을 지배할 때 반제친소의 양대 정책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938년 모스크바로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신강이 소련에게 제대로 원조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고, 국가의 후방을 빠르게 건설할 수 있는 방법이며, 항전과 건국의 힘을 증강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 관계 때문에 저는 중국 공산당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 손잡고 일본의 폭동을 저항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이것이 항전 건국의 마지막 승리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강에서 10년 동안 친소친공의 정책을 행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

소련은 원래 제가 신강에서 독립을 하기 원했는데 이는 소련의 정치적 음모였습니다. 스탈린은 밀사를 우루무치로 보내와 제가 소련에 준비한 조약에 사인하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저는 성무회의에 그 조약원본을 보내서 수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또한 외교특파원 공서에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밀약은 수정될 수 없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도 안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진의는 밀약을 실행하는데 있었다기보다는 제가 중앙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

저는 이미 소련이라는 나라가 마르크스주의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음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의 명분을 가지고 낙후국가와 민족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은밀하게 침략하려는 것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보다도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공은 소련과 같이 행동할 뿐만 아니라 신강과 소련의 가까운 관계를 이용하여 파괴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발전하려 하였으며, 의도적으로 신강을 탈취하여 그들의 본거지로 활용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제가 10년 동안 신강에서 지켜본 일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거짓도 없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본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이용하여 신강성의 주권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7월 10일 장제스는 소련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 몰로토프에게 "소련 정부가 우리나라 내정의 통일을 존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고, 이에 감사를 표한다."고 표명하면서 우회적이면서도 정중하게 신강성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재확인했다.

3.3. 국민정부의 대응

7월 13일 허잉친이 <수복신강주권방략>을 장제스에게 제출하였다. 허잉친은 성스차이가 어디까지나 이익을 위해 소련에 협력한 인물이지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그를 섣불리 제거했다간 중국공산당이 그 공백을 노려 신강성을 장악할 수 있으니 일단 성스차이의 요구를 국민정부가 수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잉친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성스차이와 중앙의 관계가 멀어지도록 도발하였고, 이로써 신강에 괴뢰정권을 세워 자신들의 신강에서의 권익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또한 성스차이가 신강에서의 정권을 상실하면 오히려 다시 친공세력이 그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가 필요로 하는 원조를 제공하여 소련이 감히 폭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북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중소동맹의 기회를 이용하여 신강 정권을 수복하고 한편으로는 성스차이는 그 지위를 유지하게 하는 대신 점차 중앙화하도록 한다. 그러한 후에 국민정부는 변경의 군비를 신속히 강화하고 모든 필요한 준비를 갖추어 다시 확실히 서북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

7월 16일 소련 정부 대표이자 주중 소련대사인 알렉산드르 판유스킨이 충칭을 찾아와 성스차이의 이상한 태도에 대해 장제스에게 직접 경고했다.
판유스킨: "성 독판이 오늘날 소련 정부에게 하는 태도를 통해서 보면 그의 뒤에는 다른 이적 세력이 있다고 추정되며 그의 좌우에 간첩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편지로 우리가 그에게 한 권고와 그가 과거에 한 일을 알게 되는 데 반드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장제스: "성 독판의 태도가 편지 안에 상세하게 나타납니까?"
판유스킨: "이 편지 안에 있는 내용은 그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묘사한 것입니다."
장제스: "귀 정부는 신강의 모든 사건에 관하여 우리 충칭정부와 교섭해야 하고, 성 독판과 독자적으로 담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사가 오늘 말한 일에 대해서는 이 편지를 상세히 보고 나서 추리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신강성 당국은 과거에 불합리한 상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후로 양국은 신강성에 관한 일들은 귀국 정부와 우리나라 중앙정부가 직접 상의할 것이며, 다시는 신강성 당국과 교섭을 하여 어떤 오해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판유스킨이 장제스에게 전달한 편지는 과거 몰로토프가 성스차이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는데 성스차이가 1941년 1월에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의 수립을 소련에 타진했다는 것까지 폭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신강과 모스크바 두 지역에 성스차이를 살해한 것이 성스차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 그러나 소련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추측하기에는 각하의 좌우에 중국을 적대시하는 제국주의 간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중소관계와 신강성을 파괴하려고 하면서 각하를 꼭두각시로 만들려 하고 있다. 1941년 1월, 각하는 우리 사람에게 '중국에서 이탈하여 신강에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을 세우고 소련에게 가입하겠다.'고 이야기하였다. (...) 또한 신강을 소비에트화하는 것은 전 중국을 소비에트화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소련 정부는 그 말을 듣고 수년 전부터 말했듯이 각하의 의견을 반대하였다. (...) 소련정부는 문제를 정상적으로 해결하여 우리들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장제스는 소련과 성스차이가 반목 중이었음을 알아차렸고 허잉친의 방안을 채택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신강성의 주권을 회수한다고 군부에 하달했다.
  • 1. 우선 제42군을 란저우에서 서안옥문으로 진주하여 하미의 소련군 제8단을 제어한다.
  • 2. 외교특파원을 파견하여 외교권을 중앙으로 회수하여 신강에서 우리의 외교를 정상화한다.
  • 3. 신강 내 공산당을 숙청한다.
  • 4. 소련 군대를 신강에서 철수하게 한다.
  • 5. 소련과 중공에 대한 첫번째 조처로 디화의 비행기제조공장을 회수한다. 기타 당무특파원 교육청장과 성부 비서장 인선을 확정한 후 우선 그들을 신강으로 보내 성스차이와 만나 다시 성스차이에게 전체 임무를 맡길 것인지 고려한다.

이에 맞추어 국민정부는 서북지역의 개발과 주민 이주정책을 공포하였다. 이는 독소전쟁 발발 후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급감하고 중앙아시아에 주둔한 소련 군대가 대거 유럽 전선으로 이동한 것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어 장제스는 34집단군 총사령관 후쭝난에게 섬서와 감숙의 군단을 3개 집단군으로 개편하여 서북 방어선을 공고히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감숙성 주천에 국방공사를 설치하여 중공과 소련의 통로를 단절하게 하였다.

3.4. 소련의 철수

장제스의 태도가 강경해진 것을 확인한 소련은 대일 안보를 위해 유지되어야 하는 중국과 중국의 뒤를 봐주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를 큰 가치가 없는 신강을 위해 망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장제스에게 추가적으로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1942년 7월 15일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마오쩌둥에게 "소련대표는 신강에서 성스차이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공당원은 필히 신강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서한을 보냄으로써 중국공산당을 통해 신강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정도로 신강을 정리하고자 했으며 미국을 통해 장제스에게 소련은 신강에 대한 야심이 없음을 드러냈다. 1942년 8월 5일 장제스와 접견한 미국의 커리는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워싱턴에 있는 소련 측 인사가 말하기를 소련은 신강을 포함하여 중국에 대해 아무런 영토적 욕심이 없다. 그러나 중국인은 소련을 불신임하는 것 같다고 했으며, 소련이 이러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이런 오해를 없애려는 한 방법인 것 같다."

1942년 8월 29일 쑹메이링이 신강성을 방문하여 성스차이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였고 이로 인하여 국민정부와 성스차이의 연결은 확고해졌다. 9월 17일 성스차이는 마오쩌민을 비롯한 200여명의 중국공산당원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소련 총영사에게 즉각 신강에서 외교관을 제외한 300명의 소련인을 모두 철수시키고 하미의 소련 군대도 물리라고 요구했다. 국민정부 역시 소련이 보유한 신강의 광산과 유전, 항공기 제조업체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미국의 지지를 촉구했다. 미국이 국민정부의 입장을 지지하자 스탈린은 신강성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1943년 가을까지 신강성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대신 소련이 개발한 두산쯔 유전을 봉쇄하고 시추장비 등을 모두 철수하였다.

4. 결과

소련의 철수로 신강성은 10년 만에 국민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신강성에 정부군을 진주시키고 1943년 봄에 우루무치에 미국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중앙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성스차이가 국민정부가 신강성의 주권을 회수하려던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한편 1943년 9월 27일 성스차이는 마오쩌민을 비롯하여 체포하였던 공산당원들을 처형하였다.

5. 참고 문헌

  • 코민테른과 중국혁명 관계사, 향청, 고려원.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신장의 역사, 제임스 A. 밀워드, 사계절.
  • 중일전쟁시기의 중소관계 : 성세재의 역할을 중심으로, 정형아, 중국근현대사연구 3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盛世才의 新疆지배와 성격, 이선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