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시몬 레쿠에 Simón Lecue |
본명 |
시몬 레쿠에 안드라데 Simón Lecue Andrade |
출생 | 1912년 2월 11일 |
스페인 왕국 바스크 아리고리아가 | |
사망 | 1984년 2월 27일 (향년 72세) |
스페인 마드리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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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바스크 아리고리아가 |
포지션 |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레프트 윙 하프 |
신체조건 | 175cm / 73kg |
등번호 | -[1] |
소속팀 |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1930~1932) 레알 베티스 (1932~1935) 레알 마드리드 CF (1935~1942) 발렌시아 CF (1942~1946) 에르쿨레스 CF (1947) 참베리 (1947~1948) 레알 사라고사 (1948~1949) |
국가대표 | 7경기 1골 ( 스페인 / 1934~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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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2]
1.1. 축구 선수
1.1.1. 클럽
레케는 데포르티보 아리고리아가(Deportivo Arrigorriaga), CD 바스코니아(CD Baskonia)를 거쳐 1930-31 시즌부터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에서 뛰게 되었다. 당시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에는 하신토 킨코세스가 있었고 레케가 합류하던 시점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승격했었다.알라베스에서 2시즌을 보낸 레케는 레알 베티스로 이적했고 1934-35 시즌에는 베티스의 첫 리그 우승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1부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 우승으로 인해 레케는 레알 마드리드에 6만 페세타를 베티스에 안겨주며 팀을 옮겼다.[3]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레케는 1936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2대0으로 달아나는 추가골을 넣어 레알 마드리드 커리어에서 유일한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하지만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면서 3년간 모든 축구 선수들의 커리어는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레케는 1939-40 시즌에 리그에서 12골을 넣는 등 분전했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레케가 있는 동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고 결국 1942년 레케는 발렌시아 소속으로 다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발렌시아에서 레케는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등과 함께 발렌시아를 1943-44 시즌 우승으로 이끌었고 1944년부터의 코파 델 레이 3연속 준우승에도 기여했다.
1946년, 발렌시아를 떠난 레케는 참베리(Chamberi)를 거쳐 1948-49 시즌에 세군다 디비시온 소속의 레알 사라고사에서 커리어를 마무리지었다.
1.1.2. 국가대표
레케의 A매치 데뷔전은 1934년 월드컵의 1라운드 경기인 브라질전이었다. 레케는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출전했고 이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스페인의 3대1 승리를 이끌었다.레케는 8강전 재경기에서 레프트 윙 하프로 출전했지만 스페인은 대회 우승팀이 될 이탈리아에 0대1로 패했다.
그 이후 레케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5경기에 더 출전했고 총 7경기에 출전, 1골을 기록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과 프리킥이 강점이었다.3. 수상
3.1. 클럽
-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4-35(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43–44( 발렌시아 CF)
-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1936( 레알 마드리드 CF)
-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35–36, 1941–42(레알 마드리드 CF)
- 코파 델 레이 준우승 5회: 1936, 1940(레알 마드리드), 1944, 1944–45, 1946(발렌시아 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