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1 19:34:42

시드니 필립스

Sidney C. "Sid" Phillips Jr. (1924.9.2 ~ 2015.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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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시드니 필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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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필립스 옹.

1. 개요2. 생애

1. 개요

시드니 필립스 주니어는 미 앨라배마 주에서 왕진을 주로 다니는 가정방문 주치의로 직업은 의사 겸 작가이다. 키는 178cm. 그는 켄 번스(Ken Burns)의 PBS 다큐멘터리, "The War"와 HBO 방송국의 전쟁 드라마 "더 퍼시픽, The Pacific"에 많은 자료와 인터뷰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에 복무했던 참전군인이며, 드라마 더 퍼시픽의 등장 인물이기도 하다.[1] 그는 미합중국 해병대 제1사단 1연대 2대대 H(How)중대 81mm 박격포병으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복무했으며, 군에서 그의 최종 계급은 상병(Corporal, Grade 5)이다. 앨라배마의 모빌 출신으로 유진 슬레지와는 동향 친구이자 배꼽친구. 유진이 심장 문제로 입대하지 못하게 됐을 때 자원하여 해병대에 입대한다. 박격포병으로 여러 전투에서 생존한 유능한 해병대원. 입대 전 유진처럼 밀덕이었고, 전역 후 군복도 싫어하게 된 유진과는 달리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파부부 전투를 끝으로 귀향해 유진의 부모에게 박격포는 소총소대보다 조금 뒤에 있으니 안전할 거라고 안심시킨다.[2] 더 퍼시픽에서는 원래는 레키네 그룹에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그네들 사이에 안 끼어 있더니 어쩐지 미국으로 돌아간다.[3]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는 배우 애슈턴 홈스(Ashton Holmes)가 시드니 필립스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2. 생애

시드니 필립스는 1924년 미국 앨라배마 주 모빌에서 시드니 필립스 시니어의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립스 시니어는 1차 대전 참전 용사로 앨라배마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다. 필립스는 1942년 유진 슬레지와 함께 머피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부모의 허락을 얻어 1941년 12월 8일 해병대에 지원한다. 과달카날 전투에서는 박격포 부대원으로써 상당한 활약을 하였고, 이후 멜버른으로 가서는 '그웬'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4] 멜버른에서의 휴식 후 필립스는 다시 글로세스터 곶 전투로 파견되었는데, 최전선에서 겨우 15 야드 후방에서 싸웠던 적도 있다고 한다. 글로세스터 곶 전투가 끝난 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V12 프로그램을 이수하여 의사가 되려고 하고, [5] 스프링힐 대학에 진학하여 내과 의사가 된다. 종전 후, 그는 1946년 메리 휴스턴이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이 때 들러리가 유진 슬레지 였다고 한다. 그는 1948년 졸업한 후 계속 내과 의사로 지냈으며, 고향인 모빌에서 2015년 9월 26일 타계했다. 그는 더 퍼시픽 이외에도 'The War' 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제작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시드니 역시 태평양 전쟁의 참상[6]에 충격을 받긴 했으나 특유의 쾌활하고 강인한 성격으로 비교적 빠르게 사회에 복귀했다고 하며 유진 슬레지나 다른 병사들과 비해 정신적 외상은 별로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후에는 다년간 극심한 PTSD 우울증, 악몽에 시달리던 유진 슬레지를 곁에서 격려하고 위로하며 "전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1] 더 퍼시픽에서는 조연이지만 컴패니언북 퍼시픽에서는 유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박격포 부대의 서사를 담당하는 주연이다. [2] 그러나 유진은 정신적 외상이 착착 진행중이었다. 게다가 박격포반은 맨 앞에 나가는 소총수보다 '조금은' 뒤에 있긴 했지만 전선 전체로 보면 사실상 소총수와 같이 맨 앞에 서는 자리였다. [3] 여기까지가 드라마의 내용이지만 컴패니언북인 퍼시픽에 따르면 징계로 인해 취사병으로 근무하다 글러스터 곶에서 귀양조로 뽑혀 복귀한 것이다. 이 때 옆 연대로 배치된 유진을 잠깐 만난다. [4] 더 퍼시픽 3화에 이 부분이 짧게나마 묘사되어 있다. [5] 글로스터 곶 전투 도중 결심하였다고 한다. [6] 2010년 인터뷰 당시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미군 전사자 시신의 목을 자르고 오체분시한 체 부패되도록 방치한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그와 그의 부대원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 동안 일본군 포로를 단 한명도 잡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는 귀국한 뒤 전쟁이 가져다 준 증오와 정신적 충격을 떨쳐내려 노력했고 비교적 수월하게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