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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기모토 키요시(杉本 清) |
출생일 | 1937년 2월 19일 ([age(1937-02-19)]세) |
출생지 | 일본 나라현 야마도타카다시 |
국적 | 일본 |
혈액형 | B형 |
학력 | 칸사이가쿠인대학 법대 졸업 |
전 소속국/부서 | 전 간사이 테레비 아나운서 |
경력 | 편성국 전임국 차장 |
활동기간 | 1961년 ~ 2004년 |
1. 개요
일본 경마 프리 아나운서이자 전 간사이 테레비의 아나운서.2. 소개
대학 재학 중 지인의 추천으로 1960년 간사이 테레비에 아르바이트로 입사, 마츠모토 노부야키 아나운서[1]와 같이 간 한신 경마장에서 마권이 적중한 것을 계기로 경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듬해 아나운서 시험을 응시 후 합격하여 정규 아나운서가 되었다.1962년의 오카상 이후로 패독 담당 아나운서가 되어, 동년 6월의 출장중의 마츠모토를 대신해 마이니치배의 실황을 담당.이 실황이 호평받아 이후에는 패독 담당 말고도 토요일에 레이스 다이제스트 실황을 맡게 되았다. 이윽고 게이트 리포트와 승리 기수 인터뷰도 겸하게 됐다.
이후 여러 에피소드와 명실황을 남기며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가다가 1997년 2월 19일에 정년 은퇴, 이후로는 킷카상, 타카라즈카 기념, 천황상 (봄) 등의 관서 G1들을 담당했다.
그것도 서서히 후배 아나운서 바바 테츠시에게 물려줘 2000년 킷카상 이후에는 타카라즈카 기념만을 중계하다가 2004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는 완전히 물러났다.
3. 특징
오랜 세월 경주를 담당한 만큼 인지도도 높은데, 특히 간사이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G1 경주인 타카라즈카 기념과 클래식 경주의 최종전인 킷카상의 실황을 상당히 오랜기간 담당하여 이 쪽으로 기억되는 일이 많다.또, 경마 중계에 여러가지 신문물을 도입한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레이스 중의 랩타임 호명이 있는데, 마츠모토 아나운서로부터 처음으로 메인 아나운서 자리를 물려받은 1969년 오카상에서 무심코 시계를 보고..
골까지 800m, 46초 걸렸습니다. 꽤 빠른 페이스, 추입마가 닿는 전개입니다.
라고 한 것이 그 시초다. [2] 당대에는 단정적인 어조로 인해 선배 아나운서들이나 시청자들로 하여금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곧 랩타임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널리 도입되었다고 한다.또한 아나운서들이 쌍안경을 활용해 직접 눈으로 보며 중계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모니터 화면을 보며 중계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그 이야기도 자서전에 회고되고 있다.
1973년의 천황상 (봄)의 중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스기모토는 3코너를 지날 때 유력마 타이 템을 놓쳐버려, "타이 템은 이 집단의 안쪽!" 같은 두루뭉실한 실황을 강요받게 되었다.[3]
이후 최종직선에서야 간신히 타이템을 찾아낸 스기모토는..
사백유성 타이 템, 타이 템이다! 타이 템 선두다! 타이 템 선두! 타이 템,
무관의 귀공자에게 봄이 찾아옵니다! 타이 템 1착! 타이 템 1착!
이라는 명실황으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정작 중계의 화면에 비친 타이 템은 4코너 즈음에서 이미 선두에 섰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스기모토 키요시는 출근 중에 경마 팬에게 "스기모토 씨, 당신 타이 템을 놓친 거 맞죠?" 라고 지적되었고, 이는 스기모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나운서들이 실황에 있어 쌍안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중계 화면을 적극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나의 꿈
특히 타카라즈카 기념에서의 "나의 꿈은 (×××)입니다." 로 대표되는 일명 나의 꿈 코멘트가 유명한데, 1977년부터 아나운서를 은퇴할 때까지 쭉 이어온 전통 있는 스크립트다.시작은 의외로 관서가 아닌 관동의 레이스 아리마 기념이었다.[4] 이 레이스는 초반부터 텐 포인트와 토쇼 보이의 매치 레이스로 진행되었는데, 계속 둘의 이름을 부르는 단조로운 해설이 반복될 것을 우려한 스기모토가, 아리마 기념이 팬 투표로 참가할 수 있는 레이스라는 것에서 착안해 "당신과 제 꿈이 달리고 있습니다." 라는 코멘트를 한 것.
이후 마음에 들었는지 관서의 팬 투표 레이스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오늘도 당신과 나의 꿈이 달립니다." 라는 형태로 계속 써먹다가, 1991년의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변화가 생겼다. 너무 오래 사용해 하지 않으려고 했던 멘트가 정작 게이트가 열리니 반사적으로 튀어나왔고, 마명 호명까지 섞여..
아나운서가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본명을 떠벌이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5] 당연히 엄청난 질책을 들었고 다음 해에는 하지 않았으나, 정작 왜 이번엔 나의 꿈을 말하지 않냐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들어와 계속 자신의 본명마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주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나름 규칙도 생겼는데, 주로 그렇게 높은 인기는 아니나 복병 역할은 할 수 있는 말, 그러나 그 확률도 높지 않은, 즉 어디까지나 꿈이여서 못 이길 것 같은 말이 그 대상이였다. 이 규칙이 깨진 것은 침묵의 일요일의 다음 해에 열린 1999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말한 "제 꿈은 사일런스 스즈카입니다." 뿐.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그랜드 마스터즈 시나리오에서 그랜드 마스터즈 레이스의 중계를 녹음했다.
4. 주요 경마 실황 목록
굵은 글씨는 G1 또는 Jpn1 실황이다.- 타카마츠노미야 기념: 1997년
- 오카상 : 1969년~ 1987년, 1989년~ 1991년, 1997년
- 천황상 봄: 1969년~ 1990년 1992년~ 2000년
- 타카라즈카 기념:1969년~ 1976년 1978년, 1981년~ 1984년, 1987년~ 2004년
- 슈카상: 1996년,1997년
- 킷카상:1969년~ 2000년
- 빅토리아 컵 → 엘리자베스 여왕배: 1970년~1990년 1995년,1997년
- 마일 챔피언십: 1984년~1998년
- 한신 3세 스테이크스 → 한신 3세 암말 스테이크스: 1969년~1990년, 1992년, 1995년, 1997년, 1998년
5. 여담
경주마 라이스 샤워의 별명인 관동의 자객을 만들어낸 당사자이다. 미호노 부르봉이 클래식 삼관왕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한 데 이어 메지로 맥퀸의 천황상 3연패까지 막아세우자, 라이스 샤워가 관동 출신인 것과 기수 마토바 히토시 특유의 마킹 전략에서 착안해 실황 중 즉석으로 붙였다.여기까지는 특유의 캐릭터 부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1995년의 천황상 (봄) 에서 부활한 이후 엄청난 인기를 모은 라이스 샤워가 그 해의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레이스 중 고장으로 안락사되자 당일의 해설 중 일으킨 실수[6]와 더불어 비판받기도 했다.
스기모토 본인도 그러한 여론과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이후 중계에서는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1]
1931~1998, 60년대 초반 8대경주 실황을 맡은 원로 아나운서.
신잔의 3관인 킷카상을 중계 하였다.
[2]
'명수'라는 별명이 있던 당대의 일류 기수 '쿠리타 마사루'에게 "1600m의 레이스에서 처음의 800m를 47초 밑으로 통과하면 선행하는 말들은 전부 부서진다."라는 말을 사전에 들었다고 한다.
[3]
그 날의 교토 경마장은 폭우로 인해 시야가 매우 나빴던 데다가, 각 말들도 모두 진흙투성이가 되어 구분이 힘든 상황이였다.
[4]
본래 스기모토는 관서 담당이므로
나카야마 경마장이나
도쿄 경마장의 실황을 하지 않으나, 1977년에는 특별히 초청되어 실황을 할 수 있었다.
[5]
그 경기에서 뱀부 메모리는 참패했다.
[6]
라이스 샤워가 낙마한 지점은 최종 코너를 돌아 최종 직선으로 진입하는 부근이였는데, 낙마를 본 관객들의 비명을 순간 홈 스트레치에 들어오는 말들을 본 관객들의 환호로 착각해 "자, 대환성!" 이라 코멘트한 것. 이후 망원경으로 낙마를 확인하고 정정하긴 했다. 또한 당시 우승마이자 그 해의 나의 꿈인 단츠 시애틀이 최종 직선에서 달려들자, "자, 나의 꿈!" 이라 코멘트한 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