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23:09:10

슈테판 도바이

파일:Ștefan Dobay.jpg
이름 슈테판 도바이
(Ștefan Dobay)
생년월일 1909년 9월 26일
사망년월일 1994년 4월 7일
국적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루마니아
출신지 둠브라비차[1]
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73cm / 77kg
등번호 -[2]
소속팀 바나툴 티미쇼아라 (1926-1929)
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930-1940)
CA 클루지 (1940-1941)
퇴레크베슈 SE (1941-1942)
플라커라 메디아슈 (1945-1948)
감독 플라커라 메디아슈 (1947-1948)
파룰 콘스탄차 (1949)
로코모티바 터르구 무레슈 (1950)
플라커라 메디아슈 (1951)
로코모티바 터르구 무레슈 (1952-1953)
디나모 오라슐 스탈린 (1954)
로코모티바 터르구 무레슈 (1955)
CCA 부쿠레슈티 (1956)
UTA 아라드 (1958)
CFR 클루지 (1958-1959)
국가대표 41경기 19골 (1930-1939)

1. 생애
1.1. 선수 생활1.2.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요안 키릴라와의 인터뷰4. 수상
4.1. 클럽4.2. 감독4.3. 개인

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도바이는 어린 시절에 은 공장과 벽돌 공장에서 견습생으로 일한 적이 있으며 그의 첫 소속팀은 바나툴 티미쇼아라였다. 그는 1930년에 리펜시아 티미쇼아라로 이적했고 1932년에 루마니아 축구계가 프로화되면서 리펜시아는 30년대 루마니아에서 꽤 잘 나가는 클럽이 되었다. 도바이도 그에 걸맞은 활약으로 팀의 4회 리그 우승과 2회 컵 대회 우승에 보탬이 되었으며 득점왕도 4회 차지하며 당시 루마니아 축구계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1940년 이후에는 헝가리의 넴제티 바이녹사그에서 뛰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다시 루마니아에 돌아왔다. 도바이는 1948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1.2. 국가대표

도바이는 1934년 1938년, 총 2회의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본선과 지역 예선을 포함하여 출전한 모든 월드컵 경기에서 전부 1골씩을 넣어 5경기 5골의 기록을 남겼다. 본선 기록만 추리면 3경기 3골로 아직도 게오르게 하지와 더불어 루마니아 대표팀 내 월드컵 통산 득점 2위에 올라있다.[4]

도바이는 루마니아 국가대표로 총 41경기에 출전, 19골을 기록했다.

1.2. 이후

도바이는 선수 생활의 막바지인 1947-48시즌부터 플라커라 메디아슈에서 선수 겸 감독이 되어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파룰 콘스탄차, 로코모티바 터르구 무레슈 등에서 감독직을 수행했고 1956년에는 CCA 부쿠레슈티의 감독으로 팀을 우승시켰다. 이것이 바로 도바이의 감독 커리어에서 유일한 우승 기록이다.

도바이는 1959년 CFR 클루지를 마지막으로, 고관절염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인해 감독에서도 은퇴했다. 다른 기록에는 1968년에 잠깐 미네룰 벌란이란 클럽의 감독직을 맡았다고도 한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는 칼룰(calul)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빠른 주력과 강력한 슈팅 파워로 상대 오른쪽 측면 수비수들을 괴롭혔다. 그의 슈팅 파워는 말 그대로 대포알같았다 하며 파울리노 알칸타라와 더불어 네트 브레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한번은 경기장 밖의 말이 그의 슈팅에 놀라 전속력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3. 요안 키릴라와의 인터뷰

1966년 도바이는 요안 키릴라(Ioan Chirila)라는 스포츠 컬럼니스트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그의 재능 중 일부를 회고했다.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미끄러져 가는 것처럼 시작했어요. -저는 슈비(Şubi. 슈바르츠의 애칭)가 반대쪽에서의 패스를 가정해서 두 개의 슬롯을 만들어준 것을 알았고 앞의 공과 함께 갑자기 일어났지만 공은 너무나 완벽했어요. 한번 공을 받으면 우리는 스피드를 살려 게이트로 내달렸죠. 너무 기술적으로 제가 결코 본 적 없었고 저는 세밀함에서 별로 좋지는 못했어요. 저는 하나 좋은 것을 알았었는데 당신이 측면으로 공을 빼면 더 효율적이고 땅에 붙은 채로 스피드를 붙여서 상대편 선수를 지나칠 수 있어요. 요니커 보그단은 훌륭한 드리블러였는데 제가 그를 모방하길 원했다면 저는 그의 대리인이 되었을거예요...
저는 슛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저는 담벼락에다 공을 찼어요. 벽에다 빨간 분필로 동그라이를 그렸고 어떤 위치에서든 정지 상태든 달리면서든 그 동그라미 안으로 슈팅을 찼죠. 그러면서 동그라미의 크기는 줄이고 거리는 늘렸어요. 수비수 키로이우와 골키퍼 파블로비치도 붙였죠. 비를 공짜로 부르던 사람들이었지만요...

4. 수상

4.1. 클럽

  • 디비자 A 우승 4회: 1932-33, 1934-35, 1935-36, 1937-38(리펜시아 티미쇼아라)
  • 쿠파 로므니에이 우승 2회: 1933-34, 1935-36(리펜시아 티미쇼아라)
  • 디비자 A 준우승 2회: 1933-34, 1938-39(리펜시아 티미쇼아라)
  • 쿠파 로므니에이 준우승 2회: 1934-35, 1936-37(리펜시아 티미쇼아라)

4.2. 감독

4.3. 개인

  • 디비자 A 득점왕 4회: 1932–33, 1933–34, 1934–35, 1936–37(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 도바이가 태어날 당시 둠브라비차는 우이센테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도 헝가리어로는 우이센테슈라 불린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4] 참고로 1위는 플로린 러두쵸이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