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외스타슈 부스케 Eustache Busk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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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수도자 외스타슈 Eustache le mo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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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170년경 ~ 1217년 8월 24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불로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센드위치 해안가 | |
아버지 | 보두앵 부스케 | |
직위 | 해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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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해적.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에 대항하는 귀족 반란군을 지원하는 프랑스군 함대을 이끌었지만, 샌드위치 해전에서 생포된 뒤 처형되었다.2. 생애
1170년경 불로뉴의 귀족 보두앵 부스케의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어 사메르의 성 울머 수도원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190년 아버지가 살해되자 수도원을 떠났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흑마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돌아와서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담마르탱의 집사가 되었다. 1202년경 르노 백작과 다투다가 집사로서 직무를 잘못 수행했다는 혐의를 적용받고 무법자로 낙인찍히고 토지를 몰수당했다.[1]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변장한 채 불로뉴와 아르델로 지역을 돌아다니며 르노의 영지를 파괴하고 경비병들을 공격하거나 말을 훔쳤다.그 후 르노의 추적을 피해 바다로 떠난 그는 해적이 되어 채널 제도, 특히 사크에 기지를 설립하고 나름의 함대를 결성한 뒤, 주변 해안 지역을 약탈하고 상선을 탈취하거나 자신에게 가장 많은 급료를 제시한 군주의 용병으로 활동했다. 1205년부터 1212년까지 존 왕에게 고용되어 북해를 종횡무진하며 지나가는 상선을 탈취하거나 노르망디 해안을 약탈했다. 그러던 1212년, 그의 오랜 적인 르노 백작이 존 왕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외스타슈는 존 왕과 관게를 끊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고용된 뒤, 잉글랜드 켄트주의 작은 해안 마을인 포크스턴을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215년 6월, 잉글랜드 귀족들이 존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존 왕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한 그들은 필리프 2세의 후계자인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후 루이 왕자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존 왕과 대결할 때, 외스타슈는 그가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를 빠르게 점령하는 데 일조한 뒤, 군수물자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배 여러 대를 한꺼번에 묶은 뒤 투석기 등 여러 원거리 무기를 그 위에 가득 채운, 일명 '떠다니는 성'을 건설해, 잉글랜드 군함 사이로 전진해 포격을 퍼부어서 잉글랜드 해군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1217년 8월, 프랑스 왕실은 도버 공방전을 치르는 루이 왕자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사촌인 로베르 드 쿠르트네가 함대 사령관을 맡았지만, 베르는 해군 지휘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외스타슈를 해군 용병대장으로 고용했다. 8월 24일, 프랑스 함대가 칼레에서 출항했다. 로베르 드 쿠르테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외스타슈는 부사령관을 맡았다. 기함에는 기사 36명이 탑승했고, 다음 3개 전함에 기사 64~89명이 탑승했으며, 나머지 전함 6척엔 무장병들이 탑승했다. 그리고 수송선 70척이 그 뒤를 따라갔다. 도버 성주 휴버트 드 버그는 이 소식을 사전에 첩보를 통해 파악한 뒤 필립 도비니에게 함대를 맡겨 요격했다. 잉글랜드 측은 전함 16~18척, 소형선 2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왕의 사생아인 리처드 피츠로이가 전함 한 척을 지휘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먼저 샌드위치 항을 접수한 뒤, 적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지나갈 때 항구에서 출진했다. 템즈 강 어귀를 향해 긴밀한 대열로 항해하던 프랑스 함대는 처음에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선두에서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선이 프랑스 함대에게 돌진했다가 반격을 받고 방향을 바꿔 물러서자, 로베르는 적이 겁에 질렸다고 간주하고 즉시 추격해 섬멸하려 했다. 외스타슈는 갑자기 항해 방향을 바꿨다간 함대가 뒤엉킬 수 있다며, 항해를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로베르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 함대에 방향을 돌려 적 함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함선들이 지시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속도를 늦추자, 잉글랜드 함대가 바람의 힘을 받으며 적을 향해 신속하게 돌진했다. 여기에 휴버트 드 버그의 기함이 독립적으로 항해해 프랑스 함대를 후방에서 공격해 수송선 2척을 포획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궁수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적 선원과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항아리에 담아뒀던 석회를 적에게 뿌려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외스타슈는 기함을 이끌고 리처드 피츠로이의 배와 교전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전함들이 하나둘씩 리처드의 배에 합류한 데 비해, 프랑스 함선들은 대열 유지에 급급하느라 기함을 지원하지 못했다.
수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프랑스 전함 1척과 수송선 64척이 침몰하거나 포획되었고, 나머지는 겨우 탈출했다. 로베르 드 쿠르트네와 프랑스 기사들은 몸값을 위해 포로로 잡혔고, 프랑스 선원과 일반 병사들은 학살당했다. 외스타슈는 기함 구석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온 뒤 몸값으로 10,000 마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리처드 피츠로이 등 잉글랜드 수뇌부는 그가 본래 존 왕에게 고용되었다가 배신한 걸 규탄하고, 그를 체포한 뒤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램버스 조약을 맺고 프랑스로 돌아갔고, 채널 제도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로 돌아갔다.
3. 여담
- 13세기 피카르디 출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음유시인이 서사시 <수도자 외스타슈 이야기(Le Roman d'Eustache le moine)>를 집필했다. 이 시는 주로 외스타슈가 불로뉴 백작 르노의 부하 노릇하다가 그와 갈등을 벌인 끝에 떠난 뒤 1년간 르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외스타슈는 이 이야기에서 숲에 은신한 뒤 다양한 변장을 하고 르노를 계속해서 속이고, 매복하고, 굴욕을 주고, 그의 말을 종종 훔치는 등 종횡무진한다. 이 이야기는 잉글랜드 왕국에도 건너와서 로빈 후드 전설에 영향을 미쳤다.
- 윌리엄 키드와 함께 만화 원피스의 해적 유스타스 키드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1]
일설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르노는 그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무죄를 선고한 뒤, 무고 혐의를 적용해 그의 토지를 몰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