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손일민(孫一民)·손기정(孫基鼎, 孫基禎) |
자 / 호 | 중은(仲殷) / 회당(晦堂) |
본관 | 일직 손씨[1][2] |
출생 | 1884년 8월 15일[3] |
경상도
밀양도호부 천화면 죽원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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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년 8월 |
중화민국 충칭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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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손기현은 그의 6촌 형이다.
2. 생애
1884년 8월 15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천화면 죽원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에서 아버지 손경헌(孫暻憲)과 어머니 여강 이씨 이용호(李龍頀)[5]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환인현에서 동창학원(東昌學院)을 설립해 한인 자제들을 가르쳤다. 이후 1915년 음력 12월에 만주 지린성에서 우재룡, 주진수 등과 협의하여 국권회복과 조선독립이 목적인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우선 국내에서의 독립단 형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을 계획했다. 이에 1917년 음력 8월 서울 인사동의 어재하(魚在河)와 경북 풍기의 채기중의 집에서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작성하여 경북과 충남의 자산가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18년에는 지린성에서 여준, 정안립(鄭安立), 김동삼, 조소앙 등 39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을 서명 및 발표했다. 그리고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장 조맹선과 협조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김대지, 고인덕, 황상규와 함께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김원봉이 포섭하여 길림으로 데려온 이성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신철휴, 서상락, 권준, 김상윤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 결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끝에 의열단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6] 또한 1920년 1월에는 지린성의 대한군정사(大韓軍政司)에서 여준, 박찬익 등과 함께 무기운반에 관한 비밀회의를 열어 무장독립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 1925년 봄에는 신민부(新民府) 검사원(檢査院)의 위원으로 추천되어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그 체계화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 시기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 단체와의 관계를 끊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후 출자한 정미소의 자금 1,000원을 인출하여 1927년 8월, 일제 관헌들의 추격을 피해 하얼빈으로 갔다가 곧이어 베이징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 북경지부에서 조성환의 지시 아래 행동하다가 이듬해 여름에 난징으로 이동해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37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정부와의 유기적인 연락관계를 취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하여 한국국민당 이사로 추대되었지만, 그해 8월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일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에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