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의 사립 대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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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글 어스로 본 소케이의 캠퍼스 |
소케이 ([ruby(早慶, ruby=そうけい)]) |
2. 소케이센
자세한 내용은 소케이센 문서 참고하십시오.이 두 대학은 매년 소케이센을 개최한다.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과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学)이 벌이는 대항전으로, 게이오대학에선 나 먼저 원리에 따라 게이소센(慶早戦)이라고도 한다.
3. 고려대 - 연세대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한일 4대학 연맹 문서 참고하십시오.김 교수는 1974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했다가 공부하기 위해 퇴사했다.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 ...
석사학위 취득 후 고려대와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생 교류 프로그램에 의해 와세다대학 연구생이 되었다. 1978년 와세다대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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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의 학교(학생) 기질을 비교한 대목은 재미있다. "학교건물이 신촌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언덕 위에 있어 이화전문이 언덕을 넘어 저편에 로맨틱하게 위치하는 점 등, 지나치게 혜택받은 그들에게 질투가 날 정도다. 연희전문 학생과 이화전문 학생이 사이가 좋은 것은 자연의 이치다.(중략) 그들은 미국학생처럼 행복하다. 청춘을 마음껏 즐긴다" "연희가 게이오라면 보성은 와세다(대학) 풍이다. 학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한다. (중략) 예를 들어 보성전문의 학생이 우연치 않은 일로 학교 밖에서 억울하게 당하거나 해를 보았을 때 학생들은 당장 집단을 이루어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한다. 무서운 학교다"
고려대학교 미국교우회
우리대학교와 고려대(아래 연고대)는 ‘한국 사학의 쌍벽’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강한 대학들이다.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는 친선경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발한 교류로 이어진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우리나라의 연고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게이오대는 우리대학교와, 와세다대는 고려대와 교류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게이오대와 와세다대의 로고 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게이오대의 로고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는 방패모양에 노란색 X자가 그려져 있고, 와세다대의 로고는 자주색의 마름모 안에 내학(內學)이 쓰여 있다. -
연세대학교
우리는 적이 아닌 라이벌 기사
4. 기타
- 재학생들 사이의 학력 편차가 매우 크다. 일반전형 이외 소케이는 에스컬레이터 전형 등 금수저를 위한 별도의 무시험 입시가 존재한다.
- 와세다대의 모집정원은 문과만 무려 7,210명.[2] 게이오기주쿠대학도 5,050명(문학부 800명, 법학부 1,200명, 종합정책학부 425명, 경제학부 1,200명, 상학부 1,000명, 환경정보학부 425명)에 달한다. 결국 소케이의 문과 정원은 상당한 규모라는 것이다.
- 소케이 대학의 여학생 비율은 평균 34~35%대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1910년대 초에 해외 유학이란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비록 합병된 나라라고 하지만 상전이 된 일본이고 학비와 물가가 비싸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윤홍섭은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신익희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보고 함께 가길 원한 것이다. 신익희는 고심 끝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2년 여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교재로 시험준비를 서둘렀다. 일본어를 익히고 공부한 끝에 가을에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정치경제학부에 거뜬히 합격하였다. 이 대학은 1882년 시게노부가 동경전문학교를 창설한 것을 모태로 1902년 와세다대학으로 개칭하고, 설립자가 메이지유신 뒤에 입각하여 총리대신을 지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한국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와세다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다. 신익희가 와세다대학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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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아사히신문 온라인 기사 검색 데이터베이스(聞蔵 Ⅱ 비주얼)의 1879년~1989년의 '아사히 신문 축쇄판'에서 검색을 한 결과, '소케이(早慶)'는 2,410 건, '게이소(慶早)'는 12건이 검색된다.
[2]
링크 참고. 문학부 660명, 교육학부 960명, 국제교양학부 600명, 문화구상학부 860명, 사회과학부 630명, 법학부 740명, 정치경제학부 900명, 상학부 900명, 인간과학부 560명, 스포츠과학부 4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