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소진형(蘇鎭亨) |
생몰 | 1886년 6월 19일 ~ 1936년 1월 25일 |
출생지 |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면 광암리 |
사망지 | 충청남도 논산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소진형은 1886년 6월 19일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면 광암리에서 출생했고, 이후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 개척리로 이주했다. 그는 공주농업학교(現 국립공주대학교)를 졸업하고 논산에서 약종상을 운영하던 중 안종운과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안종운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가입했다. 1919년, 그는 우재룡, 안종운, 권영만 등과 함께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했다. 그들은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충청남도 논산 지역 부호들에게 우송했다. 그 결과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김유현으로부터 총 6200원의 군자금을 수령하여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을 담당하는 김규일에게 전달했다.1920년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동지인 장응규를 상해에 파견하였는데,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 받고 귀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했다. 이때 소진형은 주비단의 부단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에 힘썼는데, 장응규로부터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증권 5천 원 분을 교부받아 2천 원 분을 조경준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천 원 분을 이종근에게 교부·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조달했다.
그러나 공채증권의 매각이 여의치 않게 되자 무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와 입수에 노력했지만 1920년 12월 전라북도 군산에서 활동하던 중 주비단 조직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악형과 심문을 당한 그는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논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6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소진형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