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의 날은 이 잡지의 발행일인 11월 1일에서 유래했다.
<소년>은 최남선의 주도 하에 1908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통권 23호를 발행하였으며 역사, 지리, 어문학,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거친 근대적 지식을 전파함으로써 계몽에 기여했다. 근대 한국어 문체 선택을 둘러싼 논쟁을 일단락 짓고 한국어 통사구조를 충실하게 따르는 글쓰기를 견지했다. 또한 처음부터 '소년과 그 학부형' 을 타겟팅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신문이나 문학지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었으며 본격적으로 이들의 소비 욕망에 부응하는 편집 체제를 유지했다. <거인국표류기>, <로빈손무인절도표류기> 등 소년을 겨냥한 작품을 꾸준히 번역하였으며 소년의 계몽에 중점을 두었다.
<소년>은 유길준과 이광수의 국한문혼용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갑오개혁 이후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있던 우리글을 만들어 냈다. 한국어 구어체에 기반해 다양한 번역체들을 수입하여 문체 확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소설에서 지문과 대화 내용을 구분하였으며 서구에서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를 본격적으로 수입하였다. <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의성어와 의태어를 순한글로 표현한 것 또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에는 주로 코드 스위칭의 방법이 이용되었다. 일본어의 한자어 부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한자어 부분들을 이어주는 조사 역할을 했던 가나(문자) 부분만 한국어의 조사로 적당히 고치는 것이었다. 이는 이미 자리잡혀 있던 일본어 문체와 일역본들을 활용하여 한글을 양적, 질적으로 풍성하게 하는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남선은 톨스토이 문학에 주목하였다. 이는 슬라브 민족의 침통하고 신비적인 성격, 국가를 진동시키는 반항의 소리로서의 톨스토이 문학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종교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사상도 번역 작품의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1909년 7월호에 실린 <현시대대도사 톨스토이선생의 교시>에서 최남선은 톨스토이를 '현시대 최대의 위인'이자 '그리스도 이후의 최대 인격'이라고 상찬하면서 '대강 그의 행사를 아는 사람은 다 숭고하고 장엄한 입으로 말하기도 어렵고 붓으로 그리기도 어려운 특별한 감동이 일어나지 않은 이 없다'고 말한다. 1910년 12월에 간행된 '톨쓰토이선생하세기념' 특집호에서는 톨스토이를 기리면서 부활을 비롯한 명저를 조선어로 번역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기존에 번역하였던 <사랑의 승전>, <조손삼대>, <어룬과 아해> 에 추가하여 <한 사람이 얼마나 땅이 잇서야 하나>, <차관>, <너의 니웃> 을 소개했다. 새로 소개된 번역들은 길이와 내용에서 볼 때 본격적인 단편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는 이렇게 확립된 문체를 통해 <헌신자> 를 창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우리 근대 문학의 문을 열었다.
출처 : 정선태, 「번역과 근대 소설 문체의 발견 - 잡지 『소년』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48, 2004, 7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