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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당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석원(石元) |
본관 | 충주 석씨[1] # |
출생 | 1908년[2] 2월 8일 |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일암동 (현 함경북도 어랑군 이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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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5년 10월 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24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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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석수학은 1908년 2월 8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일암동(현 어랑군 이향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31년 2월 7일 경성군 주남면 소요동(현 어랑군 소요리)에 거주하는 조덕훈(趙德勳)의 집에 모여 일제로부터 조선 대중을 구하는 길은 무산자 혁명에 의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농민의 단합과 항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명천농민조합(明川農民組合)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함경북도 공산당 관계 혐의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2년 11월 20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1933년 7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4년 7월 25일 출옥한 후 서울특별시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5년 10월 6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석수학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4년 10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선전관공파 27세손.
[2]
193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