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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황제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명나라의 반란자 烈帝 | 열제 |
|
존호 | 중흥복열황제(中興福烈皇帝) |
연호 | 대성흥승(大成興勝, 1622) |
성씨 | 서(徐) |
휘 | 홍유(鴻儒) |
부모 | 아버지 서씨(徐氏) |
생몰 | ? ~ 1622년 12월 23일 |
재위 | 1622년 6월 19일 ~ 1622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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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시기 산둥 거야(巨野) 사람으로 백련교 소속이며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자칭한 인물이다.2. 생애
서홍유의 초기 생애는 전해지지 않으며 단지 백련교 소속으로 지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천계제 2년인 1622년 6월 19일, 지금의 윈청현에서 봉기를 일으켜 자신을 '중흥복열황제(中興福烈皇帝)'라 칭하였고 연호를 대성흥승(大成興勝)[1]이라 개원하였다. 그가 즉위하자 많은 원주민들이 호응했으며 그들은 홍건을 착용하고 진격하니 지금의 등주시(滕州市), 추성시(邹城市)를 점령했으며 취푸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동년 10월 명 조정에서 정규군을 파견해 진압당하니 서홍유는 휘하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관군에 넘겨졌고 동년 12월 23일 처형당했다. 비록 그의 봉기는 실패했으나 이 시점을 기준으로 명나라는 민란이 끊이질 않게 되었으며 결국 숭정제조(朝) 말기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대성흥성(大成興盛) 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