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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 |
출생 | 1714년( 숙종 40) |
사망 | 1768년( 영조 44) |
재임기간 | 제181대 영의정 |
1767년
1월 9일 ~
4월 15일 (음력 1766년, 영조 42년 12월 9일 ~ 영조 43년 3월 17일) |
|
시호 | 문청(文淸) |
본관 | 대구 서씨 |
자 | 일지 |
호 | 송옹, 졸옹 |
붕당 | 소론 |
부모 |
부친 - 서명균(徐命均, 1680 ~ 1745) 모친 - 청풍 김씨 김구의 딸 |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할아버지·아버지·본인 삼대가 재상을 지냈다.
2. 생애
영조 9년인 약관인 20세(1730년)에 진사시에 장원한 후 174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정언과 지평을 거쳐 1744년인 영조 20년에 홍문록에 피선되고 주서·부교리·수찬·교리·응교·이조정랑 등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고 1750년 영조 26년 유신(儒臣)으로 호칭되는 옥당[1]의 장관을 비롯 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예문제학·형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영조 3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사도세자를 모함한 김상로와 홍계희 등을 탄핵하였고 세자시강원의 빈객으로 사도세자를 교도하여 그 보호에 힘썼다. 사도세자가 죽고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을 김귀주와 정후겸 등이 위협하자 세손보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정조에게 추앙을 받았다. 1765년인 영조 42년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서명균은 경종 때 소론 중에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서지수 역시 소론 온건파로 탕평책에 힘썼다. 이는 그가 소론임에도 노론에게 상당한 호평을 받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2]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 8월 1일 병진 1번째기사 1768년 청 건륭(乾隆) 33년 판 중추부사 서지수의 졸기. 판중추부사 서지수(徐志修)가 졸(卒)하였다. 서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소박해서 잇따라 태부(台府) 에 올랐으나, 충신 염결(忠愼廉潔)함을 스스로 지니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전후로 여러 번 바른 말을 올렸고 이미 정승에 들어가자 중외의 서민이 모두 기뻐하였다. 정승의 자리에 오래 있지 아니하여 비록 시행한 바가 없었으나 여정(輿情)의 신망이 끝까지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니 도성 백성이 시장을 파하고 서로 슬퍼하였다. |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 8월 1일 병진 4번째기사 1768년 청 건륭(乾隆) 33년 서지수와 좌의정의 시호와 부의에 관한 일을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아! 서 판부사(判府事) 의 삼대(三代)를 내가 예전과 지금에 모두 보았고 모두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물며 삼대가 옛날에도 섬겼고 나를 섬겼으니, 나라를 위하는 참된 충성을 대대로 전하였다고 이를 만한데, 절혜(節惠)의 법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본가(本家)에 신칙하여 곧 시장(諡狀)을 올리게 하고 바로 시호를 의논하여 석달 안에 거행함으로써 나의 권권(眷眷)한 뜻을 표시하게 하며, 고 좌의정[3]의 시호는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한결같이 거행하게 하라. 아! 나를 섬긴 두 정승에 대해 늙은 나이에 모두 시호를 의논하게 되니, 또한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창연(愴然)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제 대신이 아뢴것을 듣건대 벼슬이 정승 자리에 이르렀으나 청렴하고 가난하다고 하니 숭상할 만하다. 본래의 치부(致賻) 외에 제물(祭物)을 더 주고 그 아들은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게 하라." |
3. 여담
서지수는 3대가 정승을 지낸 기염을 토하였다.[4] 그의 증조부는 병조참의 서문상[5] 이고 조부는 숙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서종태이다. 아버지는 경종~ 영조때 좌의정을 역임한 서명균이며 서지수 본인 역시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동생인 서명빈은 이조판서와 판의금[6]에 올랐다. 외가는 노론이었는데 외조부 역시 숙종 때 우의정을 역임은 김구[7]였으며 김구의 아들이자 20년간 영의정을 역임해 김재로[8]와 그 아들 김치인[9]도 영의정을 역임하였다.[10] 더욱이 김구의 동생이자 김유의 아들인 김상로, 김약로 등 가까운 인척도 모두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인 정조때 서유신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손자이자 서유신의 아들인 서영보도 순조때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서영보의 아들이자 서지수의 증손자인 서기순도 철종 때 대제학을 역임하여 삼대가 대제학[11]을 역임하는 기염을 통한다. 그외 손자인 병조판서 서경보 등을 중심으로 서지수의 직계에서 정경이 쏟아져 나왔으며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와 그 아비 달성부원군 서종제도 근친이었다. 촌수 차이가 조금 나나 역시 친척인 서종옥이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그 아들인 서명응과 서명선은 각각 정조 때 이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했다. 서명응의 아들인 호조판서 서호수, 손자인 대제학 서유구는 북학파의 비조로 이 부자손으로부터 임원경제지, 해동농서, 완영일록, 화영일록, 대악후보, 고사십이집 등이 쏟아져나와 농예발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1]
홍문관의 별칭.
[2]
노소론을 떠나 당시 이건창의 당의통략에서도 현상(賢相)으로 허여받았다고 한다.
[3]
서명균을 의미한다.
[4]
3대 모두
소론에 속하였다.
[5]
형은 역시
소론으로
영의정까지 역임한
서문중이다.
[6]
숭반(崇班)의 중신(重臣)으로 의정 다음인 종1품이다.
[7]
노론이다.
[8]
외삼촌이다.
[9]
서지수와는 이종사촌이 된다.
[10]
그럼 이 집안도 부자손 3대가
정승집안이다. 김구(우의정), 김재로(영의정), 김치인(영의정)
[11]
대제학을 문형이라 칭할만큼 문치가 국시인 조선에서 대제학은 정승과 맘먹는 가문의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