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용즙(用楫) |
본관 | 이천 서씨[1] |
출생 | 1908년 2월 7일 |
함경북도
경원군 의동면 삼리김희동 (現 함경북도 경원군 유다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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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년 3월 30일 (향년 61세) |
중국 헤이룽장성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108실-155호 |
종교 | 대종교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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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8년 2월 7일 함경북도 경원군 의동면 삼리김희동(現 경원군 유다섬리)에서 아버지 서일과 어머니 평강 채씨(1875. 1. 10 ~ ?)[2]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중화민국으로 망명했고, 아버지 서일 사후 1925년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3]에서 대종교에 입교해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1932년 안희제가 남북국시대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가 있었던 동경성 일대에 발해농장을 개척하고 이를 독립운동기지 및 거점으로 활용해 비밀리에 독립군과 제휴한 뒤 대봉기를 계획했는데, 대종교 교단에서는 이곳에 총본사를 설치했다. 그리고 상경용천부 터에 천진전(天眞殿)을 건립하고 교육기관으로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때 이극로가 천진전 건립을 후원하기 위해 대종교 제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에게 「널리 펴는 말」이라는 후원문을 지어 보냈는데, 일제는 이 후원문을 날조해 대종교에 대해 탄압을 가하고 중심 인물들을 검거하는 빌미로 삼았다. 1942년 11월 19일 마침내 '임오교변'이 일어나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 중심 인물 21명이 만주국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서윤제 또한 이때 함께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뒤 목단강성(牧丹江省) 목단강시 액하(掖河)[4]에 있던 목단강시 경무청 산하 액하감옥에서 1년 1개월 13일간 옥고를 치른 뒤 1944년 1월 2일 출옥했다. 출옥 후에도 대종교 전교를 위해 지하 활동을 전개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헤이룽장성에 그대로 남아 살다가 1969년 3월 30일 그곳에서 별세했다. 1993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2007년 11월 7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