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شجر الدر Shajar al - Dur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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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
사망 | 1257년 4월 28일 |
재위기간 | 1250년 5월 2일 ~ 1250년 7월 |
휘 | 샤자르 알 두르 |
존호 |
알 말리카 이스마트 앗 딘 아드 움 칼릴 샤자르 알 두르 |
왕조 | 아이유브 왕조 |
배우자 | 일투트미시 카툰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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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맘루크 왕조의 첫 번째 술탄이자 중동 역사상 유일한 여성 술탄. 하렘 출신으로 여성 술탄에 등극한 입지전적인 여성이다.이름의 뜻은 '진주 나무'라는 의미이다.
쿠르드계 수니파 아이유브 왕조의 제7대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아내로 남편과 의붓 아들이 연달아 죽자, 맘루크들의 추대를 받아 맘루크 왕조의 초대 술탄이 되었다.(1250)
2. 생애
2.1. 전반생과 왕후로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하렘에서 일하던 여성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결혼하여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무슬림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체르케스나 튀르크, 혹은 아르메니아 출신이라고 한다.제7차 십자군 전쟁 중 남편인 술탄 알 살리흐가 병사하자, 침착하게 남편의 승하를 숨기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죽은 남편의 뒤를 이어 알 무아잠 투란샤(Al-Muazzam Turanshah)가 아이유브 왕조 제8대 술탄이 되었다. 알 투란샤는 선왕 알 살리흐의 첫 번째 아내의 아들이었다.
알 투란샤는 후계자 기간 동안 변방을 통치했기 때문에, 수도 카이로에서의 기반이 없어 변방의 아미르들을 데려왔고, 전공이 있는 수도의 아미르들과 바흐리[1]들를 배척했다. 분노한 튀르크인 맘루크 바이바르스와 바흐리들은 같은 튀르크계 왕족인 샤쟈르 알 두르를 찾아갔고, 술탄 알 투란샤는 결국 즉위 후 2개월만에 바흐리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2.2. 최초의 여성 술탄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다
이후 바흐리들의 힘을 등에 업고, 샤쟈르 알 두르가 맘루크 왕조 최초의 술탄이 되었다. 샤쟈르 알 두르는 80여일간의 재위 기간동안 십자군 전쟁 이후 포로가 된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송환문제를 다뤘다.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샤쟈르 알 두르의 술탄 지위를 인정하면서도"술탄에 적합한 남자가 이집트에 없으면 이 쪽에서 적임자를 보낼까?"
라고 비아냥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맘루크 지휘관 아이바크와 재혼해, 그에게 술탄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술탄 아이바크는 바흐리들이 자신이 아니라 샤쟈르에게 충성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가졌고, 마침 이집트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바흐리 맘루크의 대장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Faris ad-Din Aktai)가 자신의 공적을 이유로 성 안에서 아이유브 왕족의 여자와 함께 살게 해줄 것을 요구하자 그가 술탄 자리를 노린다고 여겼다.
2.3. 남편 아이바크와의 권력투쟁
결국 아이바크는 아크타이를 암살하고, 그를 따르던 바흐리 맘루크를 숙청했다. 바이바르스와 칼라운[2]을 비롯한 바흐리 맘루크의 유력자들은 이집트에서 쫓겨나, 아이바크와 대립하던 시리아의 아이유브 군주 알 나스르에게 의탁했다. 이들의 망명으로 인해 시리아와 이집트 간의 충돌이 가시화되자 이를 원치 않았던 바그다드의 칼리파가 중재에 나섰고, 아이바크가 중재의 조건으로 알 나스르가 바이바르스와 결별할 것을 내걸자 바흐리들은 다시 쫓겨나게 되었다.이렇게 아이바크가 자신을 따르는 맘루크들을 중심으로 세력 판도를 재편하자 샤쟈르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 그녀를 술탄 자리에 올려놓았던 바흐리들, 그 중에서도 그녀의 전 남편 알 살리흐가 키운 살리히야(Salihiyya) 맘루크들이 아이바크에 의해 거의 제거되었던 것이다. 자연히 아이바크와 그녀의 사이는 날로 악화되었고, 샤자르는 아이바크를 정사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시도하며 이혼을 주장하고, 자기 입지를 지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아이바크는 이혼을 요구하는 샤자르에게 전혀 겁먹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버리고 모술의 아미르인 바드르 알 딘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다.[3]
곧 사돈이 될 아이바크에게 바드르 알 딘은 결정적인 정보를 흘렸는데, 바로 샤자르가 비밀리에 시리아의 아이유브 군주인 알 나스르와 접촉했다는 첩보였다. 이에 아이바크는 자신을 술탄으로 만들어줬지만 이제는 불구대천의 정적이 되고, 자신의 뒷통수를 노린 샤자르를 제거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선수를 친 쪽은 샤자르였다. 일이 탄로났음을 깨닫고 위기감을 느낀 샤자르는 1257년 시종들을 매수하여 아이바크가 목욕을 하는 도중 살해했다. 술탄이 된 지 7년 만에 아이바크는 죽었고, 샤자르가 다시 권력을 잡을 듯이 보였다.
2.4. 재집권의 실패와 비참한 최후
하지만 일은 샤자르가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았다. 전술했듯이 당시 이집트에 있었던 맘루크 대부분은 아이바크에게 충성하는 일파였고, 샤자르를 지지하던 자들은 대부분 숙청되어 국외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샤자르가 아이바크를 죽였다는 것을 이집트의 맘루크들이 알게 된다면 그녀는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샤자르도 이를 잘 알았기에 아이바크를 살해한 다음 날 맘루크들 앞에서 그가 간밤에 급사했다고 둘러댔지만, 아이바크의 심복인 쿠투즈[4]를 위시한 맘루크들은 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자연사라고 믿지 않았다. 쿠투즈와 맘루크들은 암살을 결행한 샤자르의 시종들을 고문하여 아이바크 사망의 전모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샤자르와 시종들을 체포했다. 시종들을 모조리 처형한 쿠투즈는 내친김에 샤자르도 죽일 작정이었으나 아직 이집트에 남아있던 바흐리 맘루크의 잔당들이 그녀를 보호하자 일단 그녀가 거주하던 붉은 탑에 구금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공석이 된 술탄 자리에는 아이바크의 15살 난 어린 아들인 알 만수르 알리[5]를 앉혔다. 이로써 샤자르의 재집권 시도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비록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샤자르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쿠투즈가 어린 술탄을 앞세우고 실권을 잡은 상태에서 샤자르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는 너무나도 명확한 것이었다. 결국 4월 28일 샤자르는 술탄 알 만수르 알리와 그의 친모를 섬기던 여자 노예들에게 붙잡혀 발가벗겨진 채 나막신으로 구타당해 죽었다. 나체로 맞아죽은 그녀의 시신은 성 밖에서 발견되었는데, 후대인 오스만 시대의 역사가인 이븐 이야스는 그녀가 살해된 뒤 허리에 진주로 장식된 비단옷 한 조각만 걸친 시신이 성루에서 던져졌다고 적었다. 그 값나가는 옷을 부랑자들이 훔쳐갈 때까지 시신은 3일간 매장되지도 못한 채 해자에 방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븐 이야스는 샤자르가 살던 시대보다 100년도 더 훗날의 역사가이고, 자기 저서에 샤자르의 악행을 나열하며 가열차게 비난하던 사람이니 100% 믿을만한 기록은 아니지만[6], 그의 기록이 근거가 있다면 하렘 출신의 노예에서 가장 강력한 이슬람 국가의 술탄까지 올랐던 여성의 최후치고는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이후 바그다드가 함락되어 아바스 칼리파조가 사실상 멸망하고 몽골의 위협이 높아져가자 맘루크들 사이에서는 유약한 술탄 알 만수르 알리보다 검증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결국 알 만수르 알리는 축출되고 실권자이던 쿠투즈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쿠투즈는 자기 파벌과 대립하던 바이바르스를 비롯한 바흐리 맘루크들을 다시 받아들여 함께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과 일전을 벌이고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되었고, 최종 승자가 된 바이바르스가 술탄이 되는 것으로 이집트의 정치적 혼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평가
살라딘 사후부터 시작된 끊임없는 내분과 십자군과의 전쟁으로 기울어져 가던 아이유브 왕조 치하의 이집트를 적절히 수습하고, 맘루크에게 정권을 넘겨주어 결과적으로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가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가 될 수 있는 초석을 깔아준 인물이었다. 사적으로는 과감하고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여성으로 아이바크와 결혼한 이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자 했고, 그 결과 아이바크 뿐 아니라 그녀 자신도 비참한 파멸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쨌든 오스만 제국의 부상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이자 최강대국 역할을 했던 맘루크 왕조를 개막시켰고, 그녀가 의도했든 아니든 덕분에 몽골의 서진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 논쟁
샤쟈르를 술탄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당대에는 직접 술탄으로 불리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Malikat al-Muslim(말리카트 알 무슬림, '무슬림의 여왕'), al Malikah lsmat ad-Din umm-khalil(알 말리카흐 이스마트 앗 딘 움 칼릴, '신실한 알 만수르 칼릴의 어머니')로 알려졌다. 다만 술탄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본인도 80일 기간동안 술탄의 권력을 행사했다. 쿠데타 후 맘루크들은 그녀를 아타베그(Atabeg)[7]로 모셨다. 그녀의 이름을 새긴 디나르 화폐도 발행되었다.인정한다면 아랍권 역사상 유일한 여성 술탄이 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랍권 역사상 여성 술탄은 없다.[8] 다만 술탄은 아니었지만 예멘의 말리카툰(여왕)인 아르와 앗 술라이히가 있다.
[1]
선왕 알 살리흐의 친위 맘루크
[2]
바이바르스 사후 그의 아들들을 쫓아내고 맘루크 술탄이 되는 인물이다. 바이바르스의 유지를 이어 레반트에서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3]
바드르 알 딘은 모술을 오랫동안 통치하던
장기 왕조의 맘루크 출신으로 아이바크와 비슷하게 주군이던 장기 왕조를 멸망시키고 모술의 아미르가 되었다. 그와 아이바크는 몇 차례 충돌했던 적이 있지만, 아이바크는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자신에게 반항하던 바흐리들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적 동맹이 필요했고, 바드르 알 딘을 자신의 동맹 파트너로 삼고자 했다.
[4]
이후 맘루크 술탄이 되어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과 싸우는 그 인물이 맞다.
[5]
샤자르의 아들이 아니다.
[6]
그런 그도 샤자르가 결과적으로는 아이유브조 말기의 혼란에서 이집트를 구했다고 평가하기는 했다.
[7]
원래 오우즈 튀르크계 수니파 셀주크 왕조 시대에는 후계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의미했지만 이후 아타베그들이 실권을 장악하는 일이 빈번해져(...) 사실상 군사령관, 또는 정권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장기 왕조의 창시자인 이마드 앗 딘 장기도 아타베그였다.
[8]
이슬람권 전체로 한정하면 북인도
노예 왕조의
라지아 술타나와
수마트라 섬 사무데라 술탄국의 여성 술탄, 인도네시아 잠비 지역에 존재했던
잠비 술탄국의 따하 사이푸딘이 있었지만 후자는
맘루크 왕조에 비해 국력도 약소하고, 인지도도 미미하다(...). 그 외에 인도네시아, 인도, 몰디브 등지에 술타나들이 많았지만 국력이 작은 탓에 아체 술탄국에서 4명의 술타나들이 연달아 즉위한 것을 제외하곤 유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