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이 준이치 (笹井醇一 : 1918년 2월 13일~1942년 8월 26일)
1. 해군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도쿄에서 태어난 사사이는 아버지가 해군 대좌였으며, 훗날 특공으로 유명한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숙부였다. 1939년에 해군병학교 제67기로 졸업한 사사이 준이치는 생도 자격으로 중순양함 도네(利根)에서 잠시 근무했다가 1940년 5월에 해군 소위로 임관 후 11월에 제35기 비행생도로 선발되었다. 6갸월 후인 1941년 11월에 비행 과정을 수료한 사사이 소위는 식민지인 대만에 전개해 있던 타이난(台南) 항공대에 배치되었다.
2. 첫 격추
일본이 진주만 습격을 개시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제로센을 몰고 군계(群鷄)라는 별명답게 적극적으로 공중전을 벌였다. 당시 사사이는 또다른 격추왕이던 사카이 사부로와 경쟁하며 투쟁심을 키웠다. 사사이는 1942년 2월 3일에 자바 섬에서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군의 F2A 버팔로 전투기를 상대로 첫 격추 기록을 세웠다. 사사이 소위는 타이난 기지에서 76회 출격하는 동안 적기 27대를 격추해 타이난의 격추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일본군이 전선을 넓히며 남하하자 대만에서 라바울, 다시 뉴기니아의 라에 기지로 이동한 사사이는 연합군의 최전선인 포트 모레스비를 지척에 두게 되었다.
사사이는 타이난의 에이스로 알려져 포트 모레스비 공격시 사카이 사부로, 니시자와 히로요시, 오오타 도시오, 혼다 도시아키 같은 여러 에이스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5월 4일, 포트 모레스비 공격 당시 사카이 사부로와 함께 출격한 사사이 준이치는 미군의 벨 P-39 에어라코브라가 3대가 기습하자 고작 20초 만에 이들 모두를 격추시켰다. 가까이서 사사이를 호위했던 사카이 사부로는 이 광경을 보고 잠시 조종간에서 손을 놓고 얼이 빠진 채 박수를 보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6월 16일 포트 모레스비 기지 상공에서 에어라코브라 2대를 격추하고 25일에 또다시 1대를 잡아낸 사사이는 마틴 B-26 머로더 폭격기를 일본군으로서는 처음으로 격추하기도 했다. 그리고 B-25 폭격기, 8월 2일엔 부나 상공에서 B-17 폭격기를 격추시켜 사사이는 중위로 진급하면서 단기간에 경이적인 전과를 거두고 있었다. 또한 그의 격추 주장은 연합군의 전투보고서에 남겨진 미군기 손실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아무리 에이스라 하더라도 매우 드문 일이다.
3. 과달카날 공략
8월 7일에 미군이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사사이 중위는 다시 급파되어 상륙 작전 지원을 하던 미군 기동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1식 육상공격기 27댜로 편성된 공습 부대를 엄호하면서 타이난 항공대의 제로센 18기를 지휘하고 인솔하는 제3중대장이 되어 라바울에서 출격했다. 하지만 현대기 중에 1대는 랜딩기어가 접히지 않아 회항하여 부대는 17대로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이들을 막기 위해서 항공모함 USS 사라토가에서 발진한 F4F 와일드캣 전투기 8대, USS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와일드캣 14대가 파상 공격을 걸어왔지만, 사사이 중위가 이끄는 3중대는 22대의 미군기 중에서 9대를 격추하고 5대를 중파시켰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사사이 중위와 3중대의 제로센에 겁을 먹은 미군 기동부대는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작전에서 사사이 편대를 보좌하던 사카이 사부로는 미군 폭격기 8대를 향해 달려들다가 후방 기총에 안면에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후송되고 말았다. [1]
8월 12일에 사카이 사부로가 라바울을 떠날 때 사사이 중위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너와 헤어진다는 건 매우 괴롭다"라며 자신이 늘 차고 다니던 포효하는 호랑이가 개겨진 은제 버클을 건네주었다.
"이 물건은 우리 아버지가 전쟁이 시작될 때 우리 3형제에게 나눠준 것이다. 호랑이는 천리를 가지만 천리를 되돌아 온다는 말이 있지. 그러나 너도 천리 밖의 내지로 갔다가 반드시 돌아와 주길 바란다.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
라고 말하면서 사카이의 손을 굳게 쥐었다.
8월 14일에 사사이 중위가 라바울에서 일본의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전략)... 사카이 사부로라는 1등 비행군조가 있는데 격추기는 50대 이상, 특히 신과 같은 눈을 가져 소생의 전과 대부분은 그가 발견함에 의해 이룩한 것입니다. 또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는 세 번이나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인물과 기량도 발군이어서 해군 전투기대의 보물이라 여길 만한 인물입니다. (중략) 저의 악운에 관해서는... 절대로... 수백 번의 공중전에서도 피탄은 단 2번인 걸 보면 아직 적탄은 제 가까이 오진 않으리라 믿습니다."
4. 거듭되는 격전
8월 7일 이후 타이난 항공대는 라바울, 과달카날 사이의 왕복 2,000km 거리를 오가며 제로센의 비좁은 기내에서 파일럿들은 8시간 정도를 견디며 전투를 해내야만 했다. 한편 미 해병대의 전투기 부대는 8월 20일에 과달카날 비행장에 전개했다. 그리고 미군이 과달카날 상공의 제공권을 확보하자 일본군의 전황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게 되었다.
8월 21일에 사사이 중대의 제로센 6대는 과달카날 비행장 북서쪽의 사보 섬 남쪽 연안, 고도 4,000 m 이상의 상공에서 전날에도 과달카날 비행장에서 출격했던 미 해병대의 F4F 와일드캣 4대 편대와 조우했다. 이 때 미군 측의 에이스였던 존 스미스 해병대 소령 이하 4대와 사사이 중대의 6대는 일대 격전을 벌였다. 이 교전에서도 사사이의 실력은 빛을 발했다. 그는 4대 전부에 총탄을 명중시켰지만, 피탄 당한 미군기들이 곧바로 과달카날 비행장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라바울까지 귀환할 연료가 모자랄까 염려되어 사사이 중위는 더 이상 쫓지 않고 돌아왔다. 기적적으로 사사이 중대의 피해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인 8월 22일과 23일에도 사사이 중대는 연달아 출격하며 8시간 임무를 강행했다. 악천후와 피로가 겹쳐도 25일에 다시 사사이는 출격했지만 이번에는 적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5. 미군 에이스와 승부
8월 26일 오전, 사사이 준이치 중위는 1식 육공 17대를 호위하는 제로센 9대 편대의 지휘관이 되어 과달카날 상공에서 반격하러 나온 미 해병대의 와일드캣 12대와 교전을 펼치게 된다. 해병대의 에이스 매리언 칼(Marion Eugene Carl : 1915~1998 / 18.5킬) 대위를 혼자서 추격한 사사이는 과달카날 비행장에 착륙하는 순간을 노려 기습하려 했지만 기관포 레버를 당기기 직전에 비행장에서 대공포 세례가 쏟아졌다. 사사이 중위는 해병대원들의 눈앞에서 낮게 날며 용맹을 떨쳤는데 이에 겁을 먹은 미군 수 백명이 사사이가 탄 제로센 11대를 상대로 대공포와 소총까지 모두 동원해 쏘아댔다. 그러자 칼 대위가 사사이 중위에 꼬리를 물고 공격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미 실전에 단련된 사사이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로센의 압도적인 상승력을 십분 활용해 도다시 위치를 역전한 사사이는 재차 매리언 칼을 향해 기총을 발사했다. 칼 대위의 와일드캣도 피탄 당했지만 상승하던 사사이의 제로센은 지상으로부터의 대공 사격에 명중했고, 기체가 불덩어리가 되면서 과달카날 비행장 인근 해안에 떨어져 대폭발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때 사사이가 몰던 전투기의 파편들이 해병대원들의 눈 앞에 마구 떨어졌는데 나중에 산소통이 해안가에서 발견되어 칼 대위의 전리품이 되었다.
6. 모두에게 충격을 준 죽음
당시 라바울에 있던 일본해군의 보도반원인 요시다 하지메에 의하면 아무리 기다려도 사사이 중위의 기체가 돌아오지 않자 기지 전체가 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타이난 항공대 사령관이던 사이토 마사히사 대좌는 해질녁까지 비행장에 우뚝 서서 부하 사사이 준이치를 기다렸다. 그때까지 사사이 준이치는 숱한 공중전을 겪으면서도 격추나 불시착은 커녕 부상 한번 입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비행복을 입고 기다리던 젊은 조종사들은 기지 뒤 자스민 나무 아래에 모여 모두 절규했다. 이 날 사사이의 사망을 알지 못했던 부하가 그의 젓가락 상자를 식당에 들고 오자 다카츠카 비행조장은 이제 사사이 중위님과 우리는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한편, 치료를 위해 일본에 있던 사카이 사부로에게는 군 상부의 명령에 의해 전력에 누가 될 것을 우려해 반년 동안이나 사사이 준이치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존경해 마지 않던 사사이 중위의 죽음을 알게 된 사카이는 "내가 따라갔다면 중위님은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며칠이나 침울했다고 한다. 일본의 에이스이자 라바울의 귀공자로 불리던 사사이 준이치를 격추시킨 칼 대위는 순식간에 미군의 영웅이 되었는데 나중에 비행교관이 된 그는 이 전투를 교훈으로 생도들에게 어디까지나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정신을 놓지 말고 불리한 순간에서도 여유를 가질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상관들에게는 유능한 부하이며 부하들에게는 인자하고 믿음직하기 짝이 없던 편대장이었던 사사이 준이치 중위는 꽃다운 나이인 24세에 전사했는데, 일본 해군은 그가 죽고 난 후 2계급 특진을 시켜 소좌 계급을 추서했다.
[1]
이에 관해서는 실제 전투 중 입은 부상이 아니라 위안부에게서 옮은 성병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