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20:33:28

사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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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談

( ? ~ 기원전 110년)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로 그는 천문과 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전적을 관장했다. 한무제 한나라 황실의 봉선 의식에 참여하지 못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아들에게 자신이 쓰던 사적을 완성해 달라고 유언했다.

저 봉선의식이란 중국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이다. 따라서 시대를 잘 만난 뛰어난 명군이나 할 수 있었던 의식이었으며,[1][2] 참가 자격 역시 그에 걸맞은 지위와 황제의 신임을 얻어야만 겨우 가능했다. 사마담으로선 평생 1번 얻기도 힘든 기회를 놓쳤으니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던 것.[3]

한서 사마천 열전에 의하면 제자백가 사상 중 음양가, 유가, 법가, 묵가, 명가, 도가를 비교하면서 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도가는 이러한 사상들의 장점만을 모두 취할 수 있다며 도가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가식 무위지치를 지향했던 한문제 한경제 시기를 문경지치라 하여 매우 높게 평가했다.

《사기》에서는 피휘를 해서 담(談)자를 동(同)자로 기록했다.

[1] 그랬던 만큼 당태종도 "나 정도면 해도 되지 않나?" 라고 말했지만 위징은 "아직도 천하에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라며 반대해서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2] 물론 후세 평가는 당태종이 한무제보다 더 나을듯... [3] 사실 사마담이 아니더라도 한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여한 이는 곽거병의 아들인 곽선 하나뿐이다. 그 곽거병이 이룬 업적을 감안해 보면 곽거병에 비해 이룬게 별로 없고 그렇다고 조상 중에 한나라 시대에 눈에 띄는 인물도 없는 사마담이 봉선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사마담에게는 일생의 한이 될 일이지만 한무제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