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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샹클리/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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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 샹클리의 감독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은퇴 이후, 샹클리는 그의 프로 선수 생활이 시작된 칼라일 유나이티드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1948-49시즌 칼라일은 3부 리그의 하위권에서 고전하고 있었고, 잉글랜드 북쪽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의 지리적 고립으로 인해 남부 연고 선수들을 끌어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샹클리의 근면함은 1948-49 시즌에 15위를 차지했던 팀을 변화시켰다. 칼라일은 샹클리의 지휘 아래 1949-50년에는 9위로, 1950-51년에는 3위로 거의 승격을 할 뻔 했다. 상클리는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데에 능했다. 그는 지역민들에게 팀을 응원할 것을 촉구했고 팀의 변화와 그의 전략이 어떻게 팀을 발전시키고 있는지 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경기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칼라일의 1950-51 시즌 티켓 판매량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칼라일은 FA컵에서 아스날과 무승부를 달성하며 승격에 도전하는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칼라일에서 샹클리는 당시 유망한 미드필더였던 제프 트웬티먼을 선수로 지도하기도 했는데, 트웬티먼은 나중에 리버풀로 이적하여 은퇴 후, 리버풀의 수석 스카우터로서 샹클리와 일하며 유망한 선수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러나 샹클리는 약속했던 성적 보너스를 선수들에게 지급하지 않는 클럽 보드진과 시즈 말에 큰 마찰을 빚었고 결국 칼라일을 떠나게 된다. 칼라일에서의 샹클리의 성적은 95경기 42승 22패였다.

3. 그림즈비 타운 FC

샹클리는 1951년 6월 그림즈비 타운의 감독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림즈비는 1부 리그에서 연속으로 강등되어 3부 리그에 위치하고 있었고 몇몇 주축 선수들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샹클리는 좋은 선수들이 있다고 믿었고 이적 시장을 적극 활용하여 선수들을 수급하여 팀을 정비하였다. 이에 그림즈비는 1951-52 시즌 승격에 도전하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링컨 시티에 3점 뒤진 2위를 차지한다. 샹클리는 그림즈비 시절 훈련에서 5대5 훈련을 잘 활용했고, 스로인과 세트피스에 공을 들여 역습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그림즈비는 전체적으로 나이대가 높은 팀이었고 1952-53 시즌 5연승을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결국 미끄러져 5위에 그친다. 1953-54 시즌, 샹클리는 구단 보드진이 그에게 새로운 선수들을 살 돈을 주지 못하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1954년 1월에 보드진이 클럽을 성장시킬 야망을 갖지 못한 것을 이유로 들며 감독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또한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과 아내가 그림즈비에서 향수병을 느끼고 있었으며, 워킹턴 감독직을 맡으면 스코틀랜드와 위치적으로 더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에 워킹턴에서의 새로운 도전에 끌렸다고 쓰기도 했다. 그림즈비에서의 샹클리의 전적은 118경기 62승 35패였다.

4. 워킹턴 AFC

워킹턴에 샹클리가 부임할 당시 팀은 3부리그의 최하위권에 근접했지만, 샹클리는 그것을 도전으로 보고 열정적으로 팀을 지휘했다. 워킹턴은 샹클리 아래에서 1953-54 시즌 18위로 강등을 면한 것에 이어 1954-55 시즌 8위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호성적에 힘입어 워킹턴의 관중 수는 6,000명에서 8,000명으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워킹턴은 제한적인 자본으로 운영되는 작은 클럽이었고, 샹클리는 직접 전화를 받고 타이핑을 하여 편지를 쓰는 등 행정 업무의 대부분을 직접 해야만 했다. 심지어, 그는 급여를 받기 위해 매주 은행에 가야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샹클리가 맞딱트린 주요 문제들 중 하나는 지역 럭비 리그 클럽과 그라운드를 공유하는 것이었고, 샹클리는 럭비 선수들이 경기장에 미치는 손상에 대해 매우 걱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열약한 환경 끝에 샹클리는 1955년 11월 15일 감독직을 사임하고 허더즈필드 타운에서 그의 오랜 친구 앤디 비티의 아래에서 리저브 감독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의 워킹턴에서의 전적은 85경기 35승 27패였다.

5. 허더즈필드 타운 AFC

허더즈필드에서 샹클리의 첫 위치는 리저브 팀 감독이었다. 그는 1955-56 시즌이 끝난 후 2부 리그로 강등된 허더즈필드의 유스 팀에서 1군으로 진입하는 몇몇 유망주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1군 감독이었던 앤디 비티가 곧 바로 이어진 시즌에 사임하게 되었고, 샹클리는 1956년 11월 5일 그의 뒤를 이어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는 이 시즌 당시 16세의 유망주 데니스 로[1]를 1군에 투입하며 데뷔시키기도 했다. 샹클리 아래에서 허더즈필드는 1956-57 시즌 12위, 1957-58 시즌 9위, 1958-59 시즌 14위를 기록하며 승격에는 실패했는데, 당시 샹클리는 리빌딩 자금을 주지 않고 주축 선수들을 팔려고 하는 보드진에 강한 불만을 내비치고 있었다. 1959년 11월 허더즈필드의 야망 부족에 숨이 막히던 샹클리는 리버풀의 감독직 제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1959년 12월 1일 허더즈필드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허더즈필드에서의 샹클리의 전적은 129경기 49승 47패였다.

6. 리버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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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초기

1959년 12월 14일 월요일, 빌 샹클리가 안필드에 도착했을 때, 리버풀은 5년 동안 2부 리그를 전전하고 있었고 팀은 관리 부족으로 인한 열약한 환경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샹클리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독직에 취임하자 마자 리버풀을 세계 최강 '무적의 요새'로 만드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서포터들과 즉각적으로 유대감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리버풀에서 빠르게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루벤 베넷과 같은 기존 리버풀의 코칭 스태프들과 빠르게 관계를 맺었고 샹클리와 코치진들은 곧바로 서로와 클럽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샹클리는 부임 첫 날에 기존의 코치진들[2]을 불러놓고 자신은 자신만의 코치들을 데려오지 않고 기존 코치들과 클럽을 이끌 것임을 선언했고, 서로와 클럽에 대한 충성심으로 서로 강하게 유대하며 협력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기존 코치진들은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플랜을 가지고 온 샹클리에게 기쁜 마음으로 헌신했고, 이후 샹클리와 코치진들은 안필드 내의 축구화 보관 창고인 ' 부트 룸(Boot Room)'을 개조하여 비 공식 코칭 스태프 회의실로 활용하며 전술, 운영, 코칭, 팀 관리 등 클럽을 위한 무수한 논의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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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우드 훈련장에서의 샹클리

샹클리는 먼저 경기장과 훈련장 개보수에 나섰다. 당시 홈 구장이었던 안필드는 필드 잔디에 물을 줄 시설을 갖추지 못했을 정도였고 훈련장이었던 멜우드 또한 관리가 안되어 난장판인 상태였다. 샹클리는 안필드 보수를 위해 구단에 3,000 파운드의 투자를 요구했고 멜우드 부지를 개척하고 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한 개발 플랜을 구상했다. 이 뿐 아니라 샹클리는 구단의 전반적인 운영 시스템 또한 개조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세부적인 팀의 규율부터 정립해나갔다. 그의 아래에서 팀의 기강과 시스템이 잡혀나갔고 샹클리가 도입하고 페이즐리, 페이건, 베넷이 다듬은 훈련 시스템이 완성되어 나갔다. 샹클리는 선수들이 기존에 도로를 달리며 러닝 훈련을 주로 했던 것에 개탄하며, 선수들이 워밍업 운동이나 재활을 위한 특별한 운동 외에는 공을 이용한 잔디 훈련만을 하도록 훈련 방식을 전환시켰다. 샹클리의 훈련은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룹별로 운동 루틴을 나눠놓고 세션 당 구체적인 시간과 동작을 설정하는 등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스쿼트와 같은 개인 운동을 거쳐 사이클링 등의 유산소 운동을 진행한 뒤 공을 사용한 기능 운동으로 넘어가는, 실질적인 현대식 훈련 과정의 도입이기도 했다. 샹클리는 회복 과정에서도 체계적인 방식을 지시했는데, 그는 선수들에게 경기 후 훈련장으로 이동하여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기 전에, 경기장에서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하여 적절한 쿨 다운 타임을 만드는 등[3], 선수단의 부상 방지와 회복 훈련에도 애를 썼다. 또한 그는 팀이 모든 경기에서 조건에 맞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 채 플레이할 수 있도록 경기장 상태에 맞는 축구화 스터드를 골라가며 장비 관리에도 힘썼다. 여기에 가장 핵심적으로 샹클리는 전술 훈련에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는 5인조 스몰 코트 훈련을 강조하며 본인만의 '패스 앤 무브' 전술 시스템에 선수들을 맞춰나가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또한 그는 선수들에게 실전과 같은 훈련을 강조하면서, 운에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세심한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관점에서 팀의 모든 전략을 재정립해나갔다.

샹클리가 팀을 바꾸는 데에 가장 애를 쓴 부분은 선수 영입이었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리버풀은 빌리 리델과 같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커리어 말년을 보내고 있었고, 그 이외에는 평범한 선수들과 몇몇 유망주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쟁력없는 스쿼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팀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모든 포지션에서 혁신적인 스쿼드 리빌딩을 구상했다. 이에 그는 클럽의 잠재력과 좋은 선수들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클럽의 보드진을 어렵게 설득해야했다. 하지만 당시에 자금이 넉넉치 못했던 리버풀은 번번히 좋은 선수들을 놓쳐대고 있었다. 이 때, 샹클리는 리버풀에서 함께 할 중요한 협력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회계사였던 에릭 소이어. 샹클리가 역설한 투자에 중요성으로 인하여 당시 리버풀의 구단주였던 존 무어스는 소이어를 팀 단장으로 합류시켰고, 소이어가 구단에 합류한 뒤 리버풀은 좋은 재정을 유지하며 좋은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이어 또한 리버풀을 영국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겠다는 샹클리의 비전에 공감했고 샹클리와 소이어는 걸출한 영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4] 샹클리는 론 예이츠, 이안 세인트 존, 고든 밀른 등의 선수들을 영입했고 유스에서 지미 멜리아, 로니 모란, 앨런 에이코트, 개리 번, 토미 로렌스, 로저 헌트 등을 발굴하며 서서히 팀을 강력하게 꾸려나갔다. 리버풀은 이러한 샹클리와 클럽 스태프들의 노력으로 1959-60 시즌과 1960-61 시즌 리그 3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 시즌인 1961-62 시즌 로저 헌트의 리그 41골에 힘입어 2부 리그를 우승하며 1부 리그로 야심찬 승격을 하게 된다.

6.2. 1963년 ~ 1970년

샹클리의 리버풀은 1962-63 시즌 첫 1부 리그 시즌에서 승격하자마자 8위라는 괜찮은 성적을 차지했다. 이후 샹클리는 윌리엄 스티븐슨 피터 톰슨을 영입하며 점차 클럽의 성장에 박차를 가했고 정비된 리버풀의 유스 팀에서는 이안 캘러한 등의 미래의 스타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1963-64 시즌 리버풀은 팀의 6번째 이자 샹클리 하에서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로 샹클리와 리버풀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팀들 중 하나로 성장해 나갔다. 이어진 1964-1965 시즌 샹클리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1로 승리하며 그의 가장 큰 야망 중 하나였던 FA컵을 우승하며 이를 증명했다. 또한 이 시즌 리버풀은 유러피언 컵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진출하며 유럽 무대에도 데뷔하였는데,[5] 4강에서 1차전에서 엘레니오 에레라 인터 밀란을 만나 홈에서 3-1 승리를 거두었으나, 산 시로에서는 3-0으로 패배하며 합계 4-3으로 도전을 멈춰야만 했다. 승격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에 이어 두 번째 시즌에 FA컵 우승과 유러피언 컵 4강 진출이라는 말도 안되는 성적을 보여준 샹클리의 리버풀이었으나, 이어진 1964-65 시즌에는 채리티 실드를 우승하긴 했으나 누적된 피로의 여파로 리그 7위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1965-66 시즌, 채리티 실드 2연패에 이어 샹클리는 곧 바로 리그 우승을 되찾았다. 팀의 7번째 우승이자 본인의 리그 두 번째 우승이었다. 이 시즌에 리버풀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까지 진출하였으나 연장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2-1로 패배하며 유럽 대항전 우승에는 실패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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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민들 속에 서있는 샹클리[7]

1966-67 시즌에는 채리티 실드에서 지역 라이벌 에버튼을 꺾으면서 해당 컵 3연패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이후 메이저 트로피에서는 멀어졌고 리그 5위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이 시즌 샹클리의 리버풀은 유러피언 컵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아약스를 만나 합계 7-3으로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샹클리는 이후 2년 동안 리그 성적을 향상시켜 1967-68 시즌에 3위, 1968-69 시즌에 2위를 기록했지만 다시 1969-70 시즌 5위로 내려가는 등, 5시즌 간 트로피 수집에는 실패한다.[8] 이 60년대 후반 당시 샹클리의 리버풀은 몇몇 영입에 실패를 경험하며 약간 주춤하였으나 미래에 구단의 전설적인 선수가 되는 엠린 휴즈를 영입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다시 한번 영광을 위해 날아오를 도약을 대비하고 있었다.

6.3. 1970년 ~ 1974년

1969-70 시즌 샹클리의 리버풀은 주춤한 성적과 함께 다시 한번 리빌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역 라이벌 에버튼과의 리그 순위 경쟁에서 지고있었고 그간 팀을 이끌던 로저 헌트, 이안 세인트 존, 론 예이츠 등은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 이에 샹클리는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여 그의 두 번째 황금 스쿼드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67년 샹클리는 팀 내 새로운 스카우트 시스템[9] 개발하였고 이를 통해 그는 이안 캘러한 엠린 휴즈를 필두로 레이 클레멘스, 존 토샥, 알렉 린제이, 스티브 하이웨이 등을 영입하며 스쿼드를 강화했다. 브라이언 홀과 같은 유스 선수들도 스쿼드에 힘을 보탰다.[10] 샹클리의 새로운 팀은 1970-71 시즌에 5위를 유지했고 인터-시티 페어스컵 준결승에 진출하여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0-1로 패하고 말았으나 8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합계 4-1로 꺾고 올라오는 등 유망한 경기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즌에 리버풀은 1965년 이후로 처음 FA컵 결승까지도 진출했으나 아스날 FC에게 2-1로 패배하며 새로 조합된 선수단의 경험적인 미숙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샹클리는 컵 결승에 패배한 이후 팬들 앞에서 "내가 리버풀에 온 이후로 나는 안필드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팬들을 위해 경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말해왔습니다."라는 상징적인 연설을 하는 등 열의를 불태워올렸다. 이후 샹클리는 새로운 시즌에 신중을 기했고 새로운 리빌딩의 방점으로 케빈 키건을 영입한다.[11] 키건까지 영입하며 스쿼드를 완성해 야심차게 1971-72 시즌을 시작한 리버풀은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끌던 더비 카운티에 1점차로 아쉽게 뒤진 리그 2위를 차지한다. 스쿼드의 경기력에 자신감을 느낀 샹클리는 1972-73 시즌 성공을 자신하게 된다. 이 시즌에 샹클리는 선수들의 마음 속에 우승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고 상대팀들을 압박하기 위해 'THIS IS ANFIELD' 라는 문구가 적힌 유명한 명판을 안필드 입장 터널에 설치한다. 샹클리는 이 명패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러한 정신에 힘입어 리버풀은 이 시즌 팀의 8번째 리그 우승이자 샹클리 본인의 세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12] 또한 이 시즌 샹클리의 리버풀은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였는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합계 3-2로 승리하며 꿈에 그리던 첫 유럽 대항전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이는 샹클리에게 뿐 아니라 리버풀 구단 역사상 첫 유럽 대항전 우승이었다. 또한 이 시즌 샹클리의 리버풀은 영국 국적[13]의 클럽이 같은 시즌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모두 차지한 더블을 달성한 첫 사례로 남았다. 이러한 명예에 힘입어 샹클리는 1973년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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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샹클리

이어진 1973-74 시즌은 샹클리의 은퇴 시즌이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고 유러피언 컵에서도 탈락했지만 FA컵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 FA컵 결승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는 샹클리의 감독의 공식적인 커리어 마지막 경기였으며 리버풀은 3-0으로 화려하게 레전드 감독의 마지막을 축하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리버풀에서의 빌 샹클리의 총 전적은 793경기 393승 185무 17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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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채리티 실드 당시의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과 샹클리

이렇게 약 15년의 기간 동안 리버풀을 2부 리그에서 잉글랜드 최강의 클럽으로 만들어 내며 전설적인 경력을 보낸 샹클리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며 1974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뒤 밥 페이즐리 수석 코치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게 되었다. 이후, 샹클리는 1974년 채리티 실드에서 비공식적인 일일감독을 맡아 승부차기 승리를 거둔 것을 끝으로 명예롭게 축구에서의 커리어를 끝냈다. 그리고 리버풀은 샹클리가 닦아놓은 클럽의 위대한 기반을 이어받은 페이즐리 감독 휘하에서 비원의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사실상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재패하는 최절정의 전성기를 달리게 된다.


[1] 이후 맨유로 이적하여 샹클리가 지휘하게 되는 리버풀과 경쟁하게 된다. [2] 페이즐리, 페이건, 베넷 [3] 이러한 방식은 당시 구단의 물리치료사직을 겸임하던 밥 페이즐리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후에 이러한 쿨 다운 타임을 통해서 시즌 관리에 굉장한 이득을 얻었다고 당시 코치진들이 증언하기도 했다. [4] 1961년 구단 회의에서 샹클리가 스코틀랜드에서 두 명의 선수를 영입할 것을 주장했을 때, 대부분의 보드진들은 부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소이어가 힘을 실어 영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두 명이 리버풀의 60년대 중추가 되게 되는 론 예이츠 이안 세인트 존. [5] 주목할만한 것은 이 때 샹클리의 아이디어로 리버풀의 상징적인 붉은색 유니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샹클리는 그들의 선수단이 더 강력해 보일 새로운 유니폼 색상을 고민하고 있었고 이 시즌 유럽 대항전 경기에서 올 레드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곧 리그에서도 올 레드 유니폼을 입기 시작하며 영구적으로 클럽을 상징하는 색상이 채택되게 된다. [6] 샹클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샹클리와 페이즐리는 유럽 대항전에서 대륙 팀들을 상대하는 방법과 전술 및 경기 운영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7] 양 팔을 번쩍 든 이 자세가 빌 샹클리의 트레이드 마크 자세. 안필드에 있는 그의 동상도 이 자세로 만들어졌다. [8] 후에 샹클리는 이 시기를 "70년도를 준비한 평범했던 60년대 후반기"라고 표현했다. [9] 샹클리는 감독 커리어 첫 클럽이었던 칼라일에서부터 지도해온 제자 선수였던 제프 트웬티먼을 리버풀에서도 영입하여 지도하고 있었는데, 트웬티먼이 은퇴하자 그를 수석 스카우터로 고용하였고, 트웬티먼은 샹클리 사단의 눈이 되어 후에 케빈 키건, 필 닐, 앨런 한센, 이안 러시 등의 전설적인 선수들을 발굴하게 된다. [10] 대단한 것은 이 당시 리빌딩을 위해 영입된 선수들이 대부분 하위 리그에 있는 클럽들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샹클리의 발굴력과 눈을 증명할 수 있는 대목. 심지어 후에 클럽 최고의 레전드 반열에 오르는 헤이웨이의 경우 논-프로 리그에서 발굴되었다. [11] 샹클리는 키건을 '새로운 팀의 영감'이라고 불렀다. [12] 이 당시 리버풀은 리그 21연승을 달성하기도 했는데, 이는 2020년 3월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이 22연승을 달성하기 전까지 구단의 최다 연승기록이었다. [13] 잉글랜드 구단 뿐 아닌 스코틀랜드 구단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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