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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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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707><colcolor=#ededed> Big L
파일:Big L_유튜브 사진 컬러 버전.jpg
본명 <colbgcolor=#fff,#191919>Lamont Coleman
러몬트 콜먼
출생 1974년 5월 30일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할렘
사망 1999년 2월 15일 (향년 24세)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할렘 45 West 139th Street 출입구
국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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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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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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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신체 173cm, 70kg
직업 래퍼
소속 그룹 D.I.T.C[1], Children of the Corn[2][3]
활동시기 1992년 ~ 1999년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일생3. 평가4. 펀치라인5. 디스코그래피6. 뮤직비디오7. 기타
You can't kill me, I was born dead
넌 날 죽일 수 없어, 난 죽은 채로 태어났거든
Big L - Put it on
If rap was a game I'll be M.V.P.
만약 랩이 게임이었다면 난 M.V.P.
'The Most Valuable Poet' on the M.I.C.
MIC 위 가장 가치있는 시인[4]
Big L - MVP
Why do I end up in so much shit?
왜 난 항상 이런 좆같은 처지에 놓이는 거야?
I done came way too far to be callin' it quits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어
Big L - The Enemy
It seems like my life's been cursed ever since I was a child
내 삶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저주받은 것 같아
And how will I make it, I won't, that's how
난 어떤 길로 가야 성공할 수 있지? 할 수 없어, 그게 내 길이야
Big L - How Will I Mak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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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힙합 MC.

역대 힙합의 역사 중 가장 뛰어난 랩 실력을 가진 래퍼 중 한 명이자 전성기를 앞두고 정말 안타까운 사건으로 21세기를 보지 못하고 만 24세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래퍼이다.

예명인 빅 엘(Big L)은 어릴때 그가 프리스타일 랩을 하면 사람들이 그를 보고 Little과 Lamont의 이니셜인 L을 합쳐 리틀 엘(Little L)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 별명이 훗날 크면서 자연스레 리틀이 빅으로 바뀌며 정착한 것이다. 예명에 Big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마른 체형이라서 사람들은 그를 '힙합씬의 작은 거인'이라고도 부른다.

별명은 'Devil's son'이다. 악마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God's son'이 별명인 나스와 묶여서 불린다.

2. 일생

빅 엘은 아버지 찰스와 어머니 테리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자식이었다.[5] 테리의 부모님은 이를 탐탁지 않아했고 빅 엘을 입양보낼것을 권하여 결국 빅 엘은 찰스의 자매인 핑키에 의해 입양되었다. 빅 엘의 이름 중 콜먼은 친어머니 테리의 혼전 성씨이다. 빅 엘은 14살 이전에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핑키에게는 이미 도날드와 리로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빅 엘은 어려서부터 둘째 형인 리로이를 곧잘 따랐으며 어렸을 때는 통통했던 탓에 Mont Mont 등의 애칭으로 불렸다[6]. 빅 대디 케인의 노래를 듣고 힙합을 입문했다고 한다.[7] 빅 엘이 5살 때 엄마가 디제잉 장비들을 사주셔서 도날드가 디제잉을 하면 빅 엘이 빅 대디 케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고 한다. 12살 때부터는 이웃 사람들 앞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하고 다녔으며 139번가[8]에 있는 공원에서 라임을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예명을 빅 엘로 정하였다. 1990년 Three The Hard Way라는 그룹을 결성했으나 로드니라는 멤버가 떠난 이후 Two Hard Motherfuckers로 그룹명을 변경하였으며 결국 멤버들의 열정 문제로 해체하였다. 그 해 여름 Rock 'N' Will's라는 레코드 샵에서 열린 로드 피네스의 사인회에 참석하여 그에게 프리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에 크게 감명 받은 로드 피네스는 빅 엘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번호를 교환했다.[9]

1991년 로드 피네스의 앨범 홍보를 도우러 Yo! MTV Raps에 출연하였으며 199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해 2000여명이 참가한 프리스타일 배틀에서 우승하면서부터 인지도가 크게 쌓었고, 그 덕에 로드 피네스의 라이브 오프닝을 불렀다.

1992년 Finesse의 "Return Of The Funkyman" 앨범의 싱글 "Yes You May"의 리믹스에 참여함으로써 공식 데뷔를 하였고, 1992년 말에 쇼비즈 & AG의 앨범 "Runaway Slave"에 "Represent"라는 곡에 참여함으로써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같은 해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10] 그 후 1993년 Diggin' In The Crates의 멤버가 되었다. Children of the Corn[11]이라는 그룹도 설립하였다. 같은 해 그의 첫 싱글인 Devil's Son을 발표하였는데, 이 것이 호러코어 장르의 시작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2] 1994년 그의 두 번째 싱글인 Clinic[13]를 발표하였다.

1995년 데뷔앨범" Lifestylez Ov Da Poor & Dangerous"가 히트하였으나, 2년후 D.I.T.C.과 콜롬비아 레코드와의 트러블로 콜롬비아 레코드를 떠나게 된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레코드를 떠났다고 밝혔다[14]. 이 사태가 지난지 2년후에 D.I.T.C.과 함께 인디펜던트 싱글 'Day One', 'Dignified Soldiers', 'All Luv', 'The Enemy'를 발표하는데 이 싱글들 중 DJ프리미어가 프로듀싱한 'The Enemy'가 호평을 받았다. O.C.의 2집에도 피쳐링으로 참여하고 O.C.의 유럽 투어에서 오프닝을 맡았다. 이 해 멤버인 BloodShed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Children of the Corn을 해체하였다. 한편 자신의 레코드레이블 "Flamboyant"를 설립하고 뉴욕의 "Fat Beats"와 앨범 배급계약을 맺었으며 2집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내 1998년 "Ebonics / Size'em Up" 싱글을 발표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성공하였다. 이 싱글은 소스지에서 그해의 "베스트 인디펜던트 앨범"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또 앨범 수록곡 Deadly Combination에 2Pac과 콜라보를 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성공가도를 밟으며 앞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지만...

1999년 2월 15일, 형인 리 콜먼의 빚 때문에 갱단들이 리 콜먼을 쫒다가 빅 엘을 리 콜먼으로 오해하고 그 자리에서 총을 쏴[15] 얼굴과 가슴 쪽에 9발의 총알을 맞고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16] 범인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총을 쏜 점, 확실한 범행 동기가 밝혀지지 않은 점 등 투팍, 비기의 죽음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이때 그는 한참 전성기에 접어드는 중이었고, 대중적으로 빛을 보지 못한 상태로 세상을 떠나 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17] 여담으로 그가 죽은 곳은 그의 히트곡 'Put It On'의 뮤직 비디오를 찍었던 거리였다.

사후 나스, JAY-Z[18]등 많은 래퍼가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였다. 에미넴의 Like Toy Soldiers 뮤비 마지막에 투팍, 비기 등과 함께 등장하며 갱 스타의 DJ 프리미어는 Full Clip이라는 곡 인트로에 "Big L, Rest in peace"라는 구절을 넣어 애도를 표하기도 하였다. 140번가에는 그의 추모 벽화도 그려져 있다.[19]

3. 평가

투팍 비기 동서대전이 시작되는 것에 묻힌 감이 있지만 나스를 비롯하여 모든 힙합씬의 쟁쟁한 MC들이 인정하는 전설적인 MC이며 모두가 그의 단명을 아쉬워하는 천재 래퍼이다.

그의 랩 실력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플로우, 발성, 톤, 제스처, 펀치라인, 라임 구성 등 래퍼로서의 기본기가 뭐 하나 빠짐이 없는 최상위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랩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날렵하게 때려박는 날카로운 하이톤의 랩핑이 특징으로, 현 세대 하이톤 래퍼들은 90퍼센트 이상이 빅 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무방할 정도이다. 그리고 당시 막 떠오르던 다음절 라임[20]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주로 자기 자랑에 대한 가사를 썼다. 마치 기관단총처럼 쏘아붙이는 발성과 그에 걸맞은 플로우는 그 만의 전매특허.

사실 가사 쓰는 능력으로만 봤을 때 투팍이나 비기, 나스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21] 펀치라인 하나만큼은 앞서 말한 셋을 압도할 정도이며 소름 돋는 라인들이 정말 많다. 할렘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호러코어 장르의 곡을 주로 작업했지만 Street에 빠지는 것을 멀리하고 꿈을 펼칠 것을 조언한 Street Struck, 빈민가의 흑인으로 태어나 힘들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토로한 How Will I Make It 등의 곡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프리스타일 실력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유명한데, 프리스타일 전문 가수로 불리는 JAY-Z와의 프리스타일 랩배틀에서 탈탈 털어 버릴 수준이다.[22] 또한 나스는 빅 엘을 "절대 붙고 싶지 않은 래퍼"[23]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빅 엘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짧고 굵은 평가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스의 입에서 저 정도 평가가 나올 정도면 더 이상의 설명은 각설한다.[24]

빅 엘의 가사가 폭력적이고 여성 비하적이라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러한 가사들이 그가 살아온 환경과 현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빅 엘은 할렘에서 자랐으며 항상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 중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받아 적었다고 한다. 그의 기발한 펀치라인들이 바로 그 메모장에서 나왔다고. 이 점은 슬림 셰이디와 비슷하다. 둘은 인종과 거주지가 달랐지만 사회풍자와 비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4. 펀치라인

My girls are like boomerangs. No matter how far I throw them, they come back
내 여자들은 마치 부메랑같아. 아무리 멀리 던져 버려도, 다시 돌아오더라고
Big L - MVP
Put his brains in the street. Now you can see what he was just thinkin
그 놈의 뇌를 골목에 두고 왔어, 이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지
Big L - Danger Zone
Once a brother done broke into my house and I robbed him
한 번은 어떤 자식이 내 집에 침입하길래 그를 강탈했지
Big L - Lifestyles Ov Da Poor & Dangerous
I knocked out so many teeth, the tooth fairy went bankrupt
내가 너무 많은 이빨을 부러뜨려서, 이빨 요정이 파산해버렸어
Big L - Let ‘Em Have It L
Everybody wanna be like Mike, but Mike wanna be like L
모두들 마이크처럼 되고 싶어하지만, 마이크는 L처럼 되고 싶어해
Big L - Let ‘Em Have It L
I'm so ahead of my time, my parents haven't met yet
난 시대를 너무 앞서가서, 내 부모님조차 서로 만난 적이 없지
Big L - 7 Minute Freestyle
I wouldn't give a chick 10 cents to put cheese on a Whopper
와퍼에 치즈 넣으라고 여자에게 10센트도 안 줄거야
Big L - No endz, No skinz

5. 디스코그래피

정규 1집이자 유작인 Lifestylez Ov Da Poor & Dangerous를 발매하고 음반 발매가 지연되었다가 4년 뒤에 사망해버린 관계로 1집 이후론 전부 사후앨범이자 미발표곡들이다.
빅 엘의 첫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며 동부 힙합을 대표하는 붐뱁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프로덕션은 동시대의 다른 명반들보단 좀 밀린다는 평을 받지만 이 앨범의 아이덴티티는 무엇보다도 랩 퍼포먼스로, 당대 동부의 전설이었던 비기, 나스, 제이지 등에 꿀리지 않는 랩실력을 자랑한다.
  • D.I.T.C. (2000)
Fat Joe, Lord Finesse 등이 소속된 D.I.T.C 크루의 앨범이다. 빅 엘은 총 15곡 중 리믹스를 포함해 8곡에 참여했다. 앨범 마지막 트랙인 Tribute는 빅 엘의 추모곡이다.
로커스 레이블이 빅 엘의 미발표곡을 사들여 짜깁기해서 낸 앨범이다. 사후 앨범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다. 싱글컷된 Ebonics, Size 'Em Up, Deadly Combination이 수록되어 있으며, 생전 프리스타일인 98 Freestyle이 수록되어 있다.
  • Children of the Corn: The Collector’s Edition (2003)
빅 엘이 설립한 그룹인 Children of the Corn의 앨범이다.
  • Big L: The Archives 1996-2000 (2006)
빅 엘의 명곡 중 하나로 꼽히는 Now or Never[25]가 수록되어 있다.
  • 139 & Lenox(2010)
  • Return of the Devil's Son (2010)
  • The Danger Zone (2011)
    1집 Lifestylez Ov Da Poor & Dangerous의 수록곡 8 Iz Enuff 의 데모 버전이 수록돼있다.
  • L Corleone(2012)
    COC의 멤버들의 피쳐링이 담긴 'American Dream'이 수록되어 있다. 비트는 2Pac의 곡 I Ain't Mad At Cha의 비트를 샘플링해왔다.
  • Devil's Son EP
    빅 엘의 첫 싱글인 Devil's Son이 수록되어 있다.

6. 뮤직비디오

Big L - No Endz, No Skinz (Official Music Video) | 1995
Big L - Put It On (Official Music Video) | 1995
Big L - MVP (Official Music Video) | 1995

7. 기타

  • DJ 프리미어나 D.I.T.C 멤버들의 인터뷰를 보면 평소에 말 할 때에도 마치 랩을 하듯이 과장되게 말하면서 농담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유쾌한 성격에 스튜디오 내에서 활력소 같은 존재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가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모두에게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말해서 친해지고 난 뒤에야 말이 트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 남아 있는 라이브 영상이 많지는 않지만 D.I.T.C. 멤버들과 런던, 암스테르담, 크로아티아 등 유럽에서도 공연했다. 라이브도 음원의 공격적인 플로우를 유지하면서 정말 깔끔하게 소화한다.
  • 제이지와는 첫 만남을 랩 배틀로 가졌다고 한다.[26] 빅 엘과의 배틀을 원한 제이지가 빅 엘을 불러냈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승부가 장시간 이어졌고 이후로 둘 간에 깊은 존중심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한다. 빅 엘이 제이지의 레이블에 계약하려 했다는 사실 때문에 제이지가 빅 엘을 데리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빅 엘이 제이지를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이 쪽은 내 친구 제이지인데, 진짜 쩔어"라며 소개하고 다녔다고 한다.
  • 페이스 뉴먼[27]이 Put It On의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 빅 엘이 비기를 소개해주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비기와의 친분도 있었던 모양. 정작 비기는 촬영할 동안 차 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1995년 비기와 퍼프 대디의 공연 오프닝을 빅 엘이 맡은 적도 있다. 로드 피네스에 따르면 둘이 여행도 다녔다고 한다. 빅 엘과 비기 모두 DeBarge의 Stay With Me라는 곡을 샘플링하였는데 빅 엘의 MVP가 먼저, 비기의 One More Chance가 나중에 작업되었다.
  • D.I.T.C. 멤버들의 인터뷰를 보면 컬럼비아 레코드가 빅 엘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 것에 대해 꽤나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앨범의 홍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제이지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페이스 뉴먼은 빅 엘이 같은 레이블에 소속된 Nas Illmatic이나 Fugees[28]에 묻혔던 것 같다고까지 말했다. 특히 빅 엘의 계약을 담당했던 Kurt가 떠나고 난 이후로는 빅 엘이 곡을 가져오면 "라디오에 내보낼 수 없다", "이 곡으로는 차트에 들기 힘들다" 등의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들만 있었다고 한다.
  • 도박, 특히 주사위 게임을 즐겨했다고 한다. 빅 엘의 친구들은 그가 뒷골목에서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할렘에 물든 사람은 아니었지만 도박, 힙합과 같은 문화는 즐겼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의 둘째 형인 리는 어려서부터 139번가의 짱이었다고. 사람들은 오히려 첫째 형인 도날드보다 리를 위험한 인간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 번은 빅 엘이 다른 지역에서 옷 등을 강도당했는데 며칠 뒤 자신들이 턴 사람이 139번가에 사는 빅 엘이라는 말을 들은 범인들이 다시 옷을 돌려줬다고 한다.
  • 컬럼비아 레코드를 떠난 이후 빅 엘은 한 동안 음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둘째 형인 리가 리더로 있던 NFL 크루[29]를 중심으로 파티를 열어서 그 입장료로 돈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음악 장비를 마련할 계획이었다고.
  • 당시 갱스터로서 악명이 높았던 Fat Joe를 형처럼 따랐다. 한 번은 패거리와 함께 터널에 있던 Fat Joe에게 빅 엘이 달려와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50여 명의 패거리와 함께 가 봤더니 그냥 동료 래퍼 Ma$e와 오해로 벌인 말다툼 때문이었다고... 패거리들이 Ma$e를 패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동안 Ma$e와 친했던 Fat Joe는 상황을 수습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
  • 대부(영화)의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의 성 Corleone으로 자신을 칭하곤 한다. 마이클과 빅 엘은 모두 집안에서 셋째 아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 평소에 라임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곡을 작업할 때 새로 가사를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녹음을 원테이크로 끝냈다.
  • 맥 밀러는 빅 엘을 자신이 래퍼가 되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빅 엘의 곡 제목인 Street Struck을 팔에 타투로 새기기까지 했다.
  • 특유의 핸드싸인이 있는데, 검지와 엄지를 펴서 L자를 만든다. 미드 글리에 등장하는 그 사인 맞다.
  • 발음이 특이한데, R 발음을 할때 혀를 거의 굴리지 않고 O를 [어]나 [아]로 발음해야되는 단어를 [오]로 발음한다.[30]
  • 나스와는 작업은 같이하지 못했지만 둘이 사진도 같이 찍고 같은 쇼에 출연한 걸 보면 꽤 친분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애초에 활동 무대가 같다. 비록 맨해튼 할렘과 브루클린 더치 킬즈는 떨어져있지만. Ebonics에선 나스의 목소리를 샘플링했다.
  • 2022년 5월 28일, 빅 엘을 추모하는 뜻으로 뉴욕 할렘 140번가의 이름이 Lamont "Big L" Coleman Way로 바뀌었다.


[1] Lord Finesse, Showbiz, A.G., O.C., Fat joe, Diamond D, Buckwild 등이 소속된 크루이다. 빅 엘이 막내였다. [2] Cam'ron, Ma$e, Herb McGruff, Bloodshed 등이 소속된 빅 엘이 설립한 그룹으로 이 중 Cam'ron과 Ma$e는 빅 엘의 영향으로 랩을 시작했다. [3] Children Of Corner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길 모퉁이의 아이들. [4] Big Daddy Kane과 Biz Markie의 Just Rhymin’ With Biz라는 곡에서 나온 라인이다. [5] 빅 엘의 출생 및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문서마다 이야기가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이 문서에서는 빅 엘의 첫째 형 도날드의 인터뷰와 친아버지 찰스 데이비스가 쓴 책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6] 나중에 집에 여자애를 데려왔을 때 형인 도날드를 불러다 이제 Mont Mont로는 그만 불러달라 했다고 한다. [7] 후에 나오는 The Big Picture 앨범에서 Platinum Plus에 빅 대디 케인이 참여한다. [8] 빅 엘의 가사에 자주 등장한다. [9] 이후 로드 피네스는 빅 엘을 쇼비즈, DJ프리미어 등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10] 여담으로 DJ 프리미어에 따르면 Nas도 빅 엘과 같은 날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11] Chilren of the Corner(뒷골목의 아이들)이라는 뜻인데, Children of the Corn라는 제목의 영화를 이용한 워드플레이이다. [12] 빅 엘은 인터뷰에서 그가 공포 영화를 좋아하고, 할렘의 현실이 말 그대로 공포스럽기 때문에 호러코어 장르를 작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호러코어보다 다른 스타일을 선호한다고도 언급하였다. [13] Devil's Son EP에 I Shoulda Used A Rubba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14] I was there with a bunch of strangers that didn't really know my music. [15] 단, 리 콜먼이 우들리라는 갱 멤버를 청부 살인하는데 빅 엘이 도움을 주다가 실패하여 우들리에게 복수당했다는 설 등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우들리는 어릴 적부터 빅 엘의 친구였는데, 빅 엘 살해 유력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우들리 또한 2016년, 139번가에서 총을 맞고 사망했다. # 빅 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하면 그가 속해 있던 NFL 크루의 다큐멘터리를 참고하도록 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Xf0x_pIt-fI&t=6s [16] 정작 리 콜먼은 동생이 죽었을 때 감옥에 있었는데, 출소한 뒤에 살해당했다. [17] 특히 그가 사망 직전 Roc-A-Fella Records와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 친구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다녔다는 점은 안타까움을 가중시킨다. 그의 지인들이 그를 회상하면서 항상 하는 말 중 하나가 "He had plans"일 정도이다. [18] 심지어 JAY-Z는 빅 엘 사망 전에 자신의 레이블인 Roc-A-Fella Records 와의 계약을 계획 중이었다. [19] #구글맵 [20] You Know What I'm About을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21] 사실 곡의 컨셉이나 가사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다. Royce Da 5'9"은 빅 엘의 가사가 비기, 제이지보다 낫다며 그가 살아있었다면 힙합 신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레전드가 되었을거라 평하기도 했다. [22] 특히 그의 2번째 벌스 초반부의 플로우와 펀치라인을 들어보면 그 JAY-Z가 심심하게 들릴 정도다. DJ 프리미어는 프리스타일이 끝나고 "이 방송에서 최고의 순간"이라고 칭했다. [23] Big L scared me to death. When I heard that on tape, I was scared to death. I was like there's no way I can compete if this is what I gotta compete with. [24] 훗날 나스는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가 빅 엘 생전에 같이 작업을 못 한 것이라고 말했다. [25] https://www.youtube.com/watch?v=N3Oe0kFY2gk [26] BIG L vs JAY Z 문단 참고. https://www.complex.com/music/2014/06/big-l-casualty-of-the-game [27] Nas, 빅 엘의 컬럼비아 레코드 계약을 진행한 사람으로, 일매틱이 발매되는 데에 있어 상당히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 로린 힐이 소속되어 있던 그룹. [29] Niggas For Life의 약칭이다. [30] Lifestylez Ov Da Poor & Dangerous 가사중 "I couldn't afford the 'o-r'"가 있는데 'o-r'부분을 '오-어'로 발음하고, ' 맙 딥'을 '몹 딥'으로 발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