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10:56:51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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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뉴저지 네츠 등번호 21번
케빈 에드워즈
(1993~1998)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
(2001~2005)
앤트완 라이트
(2005~2008)
보스턴 셀틱스 등번호 44번
이리 웰시
(2003~2005)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
(2005~2010)
크리스 윌콕스
(2011~2013)
시카고 불스 등번호 24번
타이러스 토마스
(2006~2010)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
(2010~2012)
라우리 마카넨
(20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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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데이비드 스칼라브리니
Brian David Scalabrine
출생 1978년 3월 18일 ([age(1978-03-18)]세)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장 206cm (6' 9")
체중 107kg (235 lbs)
윙스팬 206cm (6' 9")
포지션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2001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4순위
뉴저지 네츠 지명
소속 팀 뉴저지 네츠 (2001~2005)
보스턴 셀틱스 (2005~2010)
시카고 불스 (2010~2012)
베네통 트레비소 (2011)
지도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코치 (2013~2014)
등번호 21번 - 뉴저지
44번 - 보스턴
24번 - 시카고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밈3. 커리어
3.1. NBA 입성 전3.2. NBA 입성 후
4. 은퇴 후5. 실력과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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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농구 선수. 이탈리안 혈통의 미국인으로, 특유의 유머와 좋은 성격으로 락커룸의 분위기 메이킹을 담당하며 현역 시절 동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또한 팬들에게도 컬트적인 인기가 있어 화이트 맘바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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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A.T (Greatest Of Al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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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유투 에어볼이 나왔는데도 MVP 챈트를 받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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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Mamba

유명해진 계기는 사실 07-08 시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실력과 외모 등으로 아예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으나, 08 시즌 정규시즌에서 놀라운 경기력으로 주전들을 일찌감치 빼고 후보들을 기용하던 셀틱스에서 팬들의 눈에 띄게 된 것. 후보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못하던(…) 스칼라브리니가 나왔다는 건 그 날 경기는 도저히 질 수 없을 정도로 볼짱 다 봤다는 의미였고, 이 때문에 셀틱스 팬들은 경기가 크게 기울면 자축의 의미로 "Sca-la-bri-ni!!"를 외치곤 했다. 이후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께[1] 그가 경기에 투입되고 득점이라도 하면 난리가 나면서 그는 행운의 마스코트, 승리의 상징(…) 취급을 받았다. 이후 이적한 팀이 또 동부 1위를 다투는 시카고 불스였던지라 그의 마스코트 인생은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인터넷에서 "그는 사실 블랙 맘바[2]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화이트 맘바"식의 유머가 넘쳐나면서 이렇게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 드립의 예로는 그가 01년에 신인상을 8회 수상했다거나, 한 시즌에 MVP 3회 수상했다거나, 하프라인에서 720도 페이더웨이 쿼드러플클러치 덩크로 위닝샷을 넣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거나, 2007-08 보스턴 시절에는 평균 12.9분을 뛰고 우승반지를 딴 것을 두고 굉장한 효율성이라며 숭배하는 것 등이 있다.

여기에는 무던히 좋은 성격과 푸근하고 친근하게 생긴 외모도 한몫 했다.

3. 커리어

3.1. NBA 입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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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커뮤니티 컬리지인 highline CC에서 그는 평균 16.3득점, 9.6 리바운드, 2.9 어시스트, 1.2 스틸을 기록하며 팀의 선전을 이끌고 1997년 All-NWAACC tournament team에 선정되었다. 이후 1998년, NCAA 디비전1 소속인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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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AA 디비전1 적응을 빠르게 마친 그는 28경기를 선발로 출전해 14.6득점, 6.4 리바운드, 53.1%의 야투율을 기록하며 1999년 Pac-10 Newcomer of the Year를 수상했다. 이듬해에 17.8득점, 6.0 리바운드, 40.1% 3점 슛 성공률을 기록하며 First-team All-Pac-10에 선정되었으며, 이후 1년을 더 뛰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3.2. NBA 입성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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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드래프트 2라운드 34순위로 뉴저지 네츠에 입단하였으며, 신인시절인 2001-02시즌에는 피스톤즈와의 시범경기에서 또 한번 오른 발을 다치게 된다. 많은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극복한 뒤, 2002년 1월 31일에 열린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에서 데뷔를 치르게 된다. 신인 시절에는 평균 2.1득점, 리바운드 1.8개, 어시스트 0.8개를 기록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는 0.3득점과 0.5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에서 우승하여 결승전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맞붙게 되었지만, 팀의 첫 우승 트로피는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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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전 5차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경기에서는 본인 최고 기록인17득점을 넣어 연장 3차전 끝에 승리하였고, 2005년 1월 26일에 열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는 또 한번 능가하게 하는 29득점을 넣어 최고기록을 달성하였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45분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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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일에는 5년 계약으로 보스턴 셀틱스에서 플레이하게 되었다. 정규 시즌에서 48경기를 나가 10.7분을 소화해 1.8득점과 1.6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였다. 2008 플레이오프에서는 모두 출전하지 않았으나 결승전에서 라이벌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누르고 NBA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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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1일에는 셀틱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톰 티보도가 감독에 취임한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에 열린 친정팀 셀틱스와의 경기에서는 고작 평균 시간 3분을 소화하였지만 연장 2차전 접전 끝에 110 대 105로 승리했다. 게다가 같은 시즌에는 18경기를 출전해 1.1득점과 0.4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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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2일에는 NBA 직장 폐쇄가 시작된 동안에는 이탈리아 베네톤 트레비조에서 뛰게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NBA 직장 폐쇄가 풀려난 뒤에 계약을 해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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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1일에는 불스와 재계약을 맺었고, 같은 시즌이 끝난 뒤 현역을 은퇴하였다.

4.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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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4시즌에는 1년동안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다.

이후로는 본인과 인연이 있는 보스턴 셀틱스에서 애널리스트, 지역방송국 리포터 등으로 활동했다.

5. 실력과 인기

NBA에서 무려 11시즌을 버틴 베테랑이었다곤 하나, 사실 스칼라브리니는 커리어의 태반을 가비지멤버로 활약했기에 통산 출전경기는 520경기, 평균 출전시간도 13분, 평균 기록도 약 3득점 2리바운드 정도에 불과하다. 나름 한 팀의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하며 스칼라브리니보다 유의미한 출전시간을 받는 1차 백업급 선수들도 10시즌 이상 NBA에서 생존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실력 대비로는 엄청나게 장수한 선수였던 셈.

스칼라브리니가 동포지션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건 슈팅과 자유투 정도였는데, 3점 슛 성공률이 커리어 통산 34.4%이며 06-07 시즌에는 경기당 두 개를 시도해 40.3%를 뽑아내기도 했을 정도로 당시 빅맨 기준으로는 슈팅 레인지가 긴 편이었다. 자유투의 경우 커리어 통산 78.3%의 성공률을 기록했는데, 그처럼 자유투 시도가 극도로 적은 선수들은 성공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고려했을 때 8할 언저리의 성공률은 상당히 준수한 수치였다.

다만 그러한 슈팅 능력이 있다고 한들 NBA에서 고정적으로 활약할만한 경쟁력을 갖추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럼에도 스칼라브리니가 NBA에서 실력 대비 장수한 이유는 농구를 대하는 자세가 진지하고 팀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선수라는 점에 있었다. 그는 선수들의 올스타라고 불릴 정도로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와 평판이 정말 좋은 선수였으며, 성격이 좋고 동료들과 잘 지내기로 유명해 락커룸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었다. 지금도 NBA에서 활약에 대한 기대보다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게 평가받아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노장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스칼라브리니의 성격은 그가 커리어를 길게 이어나가는 데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준 무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칼라브리니를 정말 형편없는 선수로만 기억해선 곤란하며,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는 NCAA 디비전1, 그것도 메이저 컨퍼런스인 Pac-10에서 시즌 탑텐 플레이어 중 하나로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대학 무대에선 수위급 빅맨이었다. 또한 은퇴 후에는 현역에서 물러난지 5-6년이 지난 자신한테 일대일 대결을 신청한 현역 고등학생 농구선수를 11-0 스코어로 압살한다던지, 한 이벤트에서 시라큐스 대학교의 주전과 전직 유럽 리그 선수를 포함한 세 명의 도전자에게 일대일로 손쉽게 승리하며 "나랑 르브론의 차이보다 너랑 나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라는 명언을 남기는 등 나름대로 전직 NBA 선수다운 클래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대학에서는 뛰어났지만 기량과 운동능력이 극히 상향평준화된 NBA에선 가진 능력들의 대부분이 통하지 않았던 선수. 사실 이런 케이스 자체는 흔하다 못해 널리고 널렸는데, 그 중에서도 그가 유달리 컬트적인 숭배를 받으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팬들이 보기에 자기보다 농구를 못하게 생긴(...) 선수가 뛴다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스칼라브리니는 등장할때마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선수들은 꿈도 못 꿀 수준의 엄청난 환호를 받았으며, 슛 한 번 넣으면 말그대로 MVP 찬트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1] 물론 경기 다 끝난 마당에 심심한 팬들이 뭐라도 웃길 거리를 찾는 거였지만. [2] 코비 브라이언트의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