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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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냉전 당시 동병상련을 연상케 하는 역사와 우파적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남베트남에만 일방적으로 우호적이던 시선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냉전 후 신좌파의 대두로 인해 남베트남의 막장스러운 실상이 많이 알려지다 못해 과장되면서 반대로 남베트남 쪽에 지나치게 부당한 인식도 많이 퍼져있는 상황이다. 물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도 정훈교육 등을 중심으로 여전히 퍼져 있다.오해와 편견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의 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문 연구자들이 쓴 책을 직접 읽는 것이 좋다. 심지어 나무위키의 베트남 전쟁 문서에서 참고문헌으로는 전문 서적이나 사료적 가치가 있는 책을 거론해 놓고도, 항목에서는 사견에 가까운 내용이 많이 들어간 부분이 많다.
2.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만이 참여했다?
흔히들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군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소속 게릴라를 소탕한 수준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북베트남 정규군의 남하[1],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공습과 미군 및 남베트남 정규군의 침공, 크메르 루주와 라오스 혁명군의 저항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것이였으며, 남베트남 내부의 반정부 단체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말고도 많이 있었다.3. 베트남 공화국은 명분 없는 괴뢰국이었다?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오해가 빚어낸 결과물 중 하나로, 사실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건국 당시만 해도 베트남의 반공 독립운동 세력들이 뭉쳤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나름 존재가치가 있는 나라였다. 프랑스나 미국이 억지로 만들어낸 세력이 아니라, 1955년까지만 해도 나름 식민주의와 공산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세력이 남베트남 내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2] 물론 이런 나라의 특성이 바로 다음해인 1956년부터 사라져버린 탓에 주목받지 못하는 감이 있다.다만, 1963년 쿠데타 이후 점차적으로 자주적인 통치능력을 잃어서 괴뢰국처럼 변해갔다는 건 맞는 소리긴 하다. 그런데 이건 당시 정권의 명분이면 몰라도, 베트남 공화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명분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1963년 이후의 괴뢰국화는 군사정권 통치자들의 무능함과 정치력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다.
3.1. 제네바 합의에 대한 반발과 남북총선거 거부
북베트남에 호의적인 시각에서 흔히 드는 베트남 공화국의 정통성 부족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남북총선거의 거부이다. 물론 남북총선거가 거부된 데에는 응오딘지엠 개인의 권좌 보전 욕구나 미국의 사정, 그리고 남북총선거를 할 경우 북베트남이 이길 게 뻔하다[3][4]는 이유 등으로 거부한 탓이 컸지만, 이게 모두 응오딘지엠과 미국의 독단 때문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Nu-Anh Tran 교수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의 주류 세력이었던 반공주의 세력[5]들 전부가 제네바 합의 자체를 4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저질러왔던 배신행위의 일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남베트남에서 어차피 총선거는 불발될 수밖에 없었다. 55년에 사이공 중심가에서 20만명이 반 제네바 합의 시위를 위해 모였는데, 다소 어용시위의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20만이라는 숫자는 절대로 무시할 게 못 된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 인구가 1200만 정도였으니, 간단하게 대입해보면 인구가 약 5천만인 대한민국에서 약 83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보면 된다. 이 정도면 어용시위라고 치부해서 가볍게 볼 게 아니라, 진짜로 심각한 수준의 여론 반발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남베트남 권력자의 정치적 이익 때문이건 민심 때문이건, 총선거는 어차피 불발되는 게 필연이었고, 이것 때문에 남베트남이 그 자신의 국민들을 상대로 정통성과 명분을 상실했다고 보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교차검증된 사실이라기보단 한 교수의 주장일 뿐이니 이 역시 정설로 받아들일 순 없다
출처
4. 북베트남이 남베트남보다 잘살았다?
실제로는 남베트남이 더 잘살았다.[6] 북베트남은 미국의 대규모 폭격과 호찌민이 실시한 강제 집산화의 영향으로 경제에 타격을 입은 상황이였다. 물론 정훈교육에서 말하는 것처럼 굶어 죽는 수준은 아니었고, 반대로 남베트남의 경제력이 오늘날 대한민국 수준으로 대단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7]하지만 남베트남이 북베트남보다 잘 살았던 것은 사실상 미국의 원조가 대부분이고, 심각한 부패로 인해 이것이 실제 산업 기반 성장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북한이 있다. 북한은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과 중국의 원조로 대한민국보다 잘살았지만,[8] 북한 내부에서의 산업은 성장하지 못하고, 해외 원조에만 의존했기에 소련 해체 이후 경제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반면 해외에 의존하는 게 아닌 스스로 경제 기반을 키웠던 쿠바의 경우 소련 해체 이후 미국의 제재가 심해졌음에도 경제 성장률이 조금 낮아진 것 이외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따라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보다 잘살았다거나, 남베트남 주도로 통일이 되었다면 베트남은 지금보다 잘살 것이라는 주장은 양쪽 모두 거짓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베트남 위주로 통일이 됐더라도 그냥 현 베트남 경제의 수준보다 조금 나을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9]
5. 남베트남은 자유로웠다?
일부 정훈교육에서 종종 등장하는 주장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단 남베트남은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남베트남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긴 했다. 하지만 가톨릭만을 사실상 국교로 지정하고, 다른 종교(특히 불교)를 적극 탄압했다.[10][11] 물론 북베트남이라고 다른 건 없다. 북베트남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남베트남보다 더한 탄압을 했다. 제네바 합의 직후 많은 북베트남인들이 공산당의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 월남하지 못한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도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12] 하지만 오히려 남베트남에서 종교 탄압을 피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합류한 경우도 많다. 이 덕분에 북베트남에 의해 적화통일된 현 베트남에서는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완전하진 못하다. 물론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 남베트남에 비하면 종교 탄압이 적은건 사실이다.[13]남베트남이 자유로웠다면 남베트남의 민심이 사라지고, 실제로 학살과 부패가 수없이 나타났다는 것은 설명할 수가 없으며, 공산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고문, 학살 등은 남베트남에서도 수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티우 정부에서만 최소 20~30만 명 이상의 공식적인 정치범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남베트남은 일당제인 북베트남과 달리 다당제 선거가 이루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수준이였고, 정권교체는 쿠데타로 이루어졌다.
북베트남이 자유로웠다고 볼 순 없지만, 남베트남은 자유로웠고 북베트남만 독재와 억압에 시달렸다는 말은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이다.
6. 베트민이 독립운동을 모두 주도했다? 내셔널리스트들은 프랑스와 협력해서 정통성을 잃었다?
베트남 국민당이나 대월당 등의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즘 정당이나, 호아하오교, 까오다이교 세력 같은 종교파 독립운동 세력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베트남의 토착 불교계는 1860년부터 대규모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14] 독립운동에서 유서가 깊었다. 코친차이나가 성립된 것이 1862년이다. 이에 비하면 1930년에야 세력이 정립된 베트남 공산당은 오히려 후발주자 쪽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종교파 다수가 프랑스와 협력한 적은 있다. 그런데 이들이 프랑스와 협력하게 된 이유가 바로 베트민이 범국적 반불운동 해놓자고 해놓고 자기들이 먼저 통수쳐서 상대방 종교 수장들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트민에게 배신당한 이후로도 오히려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과 싸울 것을 결심한 찐민테나, 계속 프랑스와 동맹과 적 사이를 오고가면서 싸워왔던 레꽝빈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6.1. 베트민 공산세력에 대한 비판
레닌주의의 건설 또한 비공산주의 베트남 내셔널리스트들에 대한 호치민의 처분에 의해 지원되었다. 1900년에서 1925년 사이까지의 어떤 개인이 베트남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판 보이 짜우일 것이다. 버나드 폴은 그를 "베트남의 쑨원"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오늘날 북과 남베트남 양쪽에서 영웅으로 취급된다. 조셉 버팅어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짜우를 가장 위험한 내셔널리스트 혁명가로 간주했다. "1907년에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아마도 짜우의 요원들에 의해 선동되거나 그의 정치적 가르침에 영향받지 않은 저항 운동은 없을 것이다." 호치민은 짜우를 라이벌로 여겼고, 그가 공산주의적으로 반불 운동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큰 장애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짜우를 프랑스인들에게 "팔아넘겼고",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가장 유력한 적을 잡은 것에 기뻐해 많은 돈을 주었다,
판 보이 짜우는 호치민과 그 부하들에 의해 제거된 수천명의 내셔널리스트 지도자들 중 첫 번째 사례일 뿐이었다. 일부는 프랑스인들에게 팔아넘겨졌고(공산주의자들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은 호치민의 부하들에게 직접 처형당했다. 1946년 3월, 호는 심지어 프랑스인들과 더 많은 내셔널리스트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 공산당의 1서기 레주언은 나중에 이 운동을 "레닌의 날카로운 추천"의 창조적 실행-즉 한번에 한 적만 상대하는 실행 방법이라고 했다:"우리는 한번 반동들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인들과 타협을 맺었다... 우리의 힘을 통합하고 프랑스의 식민주의적 침략에 전국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제거 대상에 포함된 반동들 중에는 반불 내셔널리즘 정당 중 가장 컸던 베트남 국민당(VNQDD)의 당원들이 있었다. 북베트남 국방장관 보응우옌잡 장군은 하노이에서 개인적으로 국민당의 숙청을 지휘했는데,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베트남 국민당 반동들을 청산하는 일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는 그들 손에 있던 모든 지역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이 숙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46년 6월,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은 동 민 호이와 국민당을 '평화의 적'이라며 공격했고, 효과적으로 조직적 저항을 압제했으며, 베트민의 북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베트민은 전 ICP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더 많이 모았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1월 베트남 민주 공화국 국회 회의에서, 명목적인 반대의견 표명자들이 300석 초과에서 20석까지 줄어들었고, 약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진행을 지배했다."
따라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끝에, 호치민과 그 추종자들은 내셔널리즘 주제에 의존한 효과적 프로파간다의 수단을 통해, 그리고 잠재적 경쟁을 무자비하게 대부분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 베트남 전역에서 반불 운동의 주도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 Myths of the Vietnam War: The Pentagon Papers Reconsidered, 저자 로버트 F. 터너, 1972년 저술
판 보이 짜우는 호치민과 그 부하들에 의해 제거된 수천명의 내셔널리스트 지도자들 중 첫 번째 사례일 뿐이었다. 일부는 프랑스인들에게 팔아넘겨졌고(공산주의자들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은 호치민의 부하들에게 직접 처형당했다. 1946년 3월, 호는 심지어 프랑스인들과 더 많은 내셔널리스트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 공산당의 1서기 레주언은 나중에 이 운동을 "레닌의 날카로운 추천"의 창조적 실행-즉 한번에 한 적만 상대하는 실행 방법이라고 했다:"우리는 한번 반동들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인들과 타협을 맺었다... 우리의 힘을 통합하고 프랑스의 식민주의적 침략에 전국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제거 대상에 포함된 반동들 중에는 반불 내셔널리즘 정당 중 가장 컸던 베트남 국민당(VNQDD)의 당원들이 있었다. 북베트남 국방장관 보응우옌잡 장군은 하노이에서 개인적으로 국민당의 숙청을 지휘했는데,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베트남 국민당 반동들을 청산하는 일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는 그들 손에 있던 모든 지역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이 숙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46년 6월,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은 동 민 호이와 국민당을 '평화의 적'이라며 공격했고, 효과적으로 조직적 저항을 압제했으며, 베트민의 북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베트민은 전 ICP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더 많이 모았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1월 베트남 민주 공화국 국회 회의에서, 명목적인 반대의견 표명자들이 300석 초과에서 20석까지 줄어들었고, 약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진행을 지배했다."
따라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끝에, 호치민과 그 추종자들은 내셔널리즘 주제에 의존한 효과적 프로파간다의 수단을 통해, 그리고 잠재적 경쟁을 무자비하게 대부분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 베트남 전역에서 반불 운동의 주도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 Myths of the Vietnam War: The Pentagon Papers Reconsidered, 저자 로버트 F. 터너, 1972년 저술
물론 이들 종교파가 응오딘지엠에게 모조리 숙청당한 56년 이후로는 베트남 공화국 쪽도 명분을 상실했지만, 사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을 통한 명분이 있던 건 애초부터 아니었다. 오히려 베트남 공산당 쪽이 종교파들보다 더 부역행위에 가까운 짓을 했다. 베트민이 반불 운동에서 주도권을 쥐긴 했으나, 주도권을 쥔 수단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맞서 싸웠냐가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와의 협력으로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팔아넘기고 죽이는 등의 매국행위를 통해 북베트남의 경쟁자들을 없앤 뒤에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를 깨고 반불로 전향한 것이라는 점에서 베트민의 반불 운동은 정통성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공산당이 베트남을 지배할 자격이 없다는 근거일 뿐이다.
베트남 국민당은 북쪽 기반이었기 때문에 이런 공산당의 폭압의 가장 큰 피해자였고, 중국이 공산화되는 등 불리한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사이공으로 본부를 이전한다. 47년에 시작된 종교파를 비롯한 나머지 내셔널리스트들에 대한 배신 행위는 결국 국민당과 다른 북쪽 내셔널리스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만행의 연장선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비공산주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격과 매국 행위를 회상하는 발언들이 레주언이나 보응우옌잡 같은 공산당 핵심 수뇌부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보면, 이런 만행들은 조직 하부의 실행자들의 일탈조차도 아니고, 공산당 수뇌부의 철저한 공작이었던 것이다.
47년에 종교파 세력들이 프랑스로 편을 바꾼 것으로 정통성이 깎여나갔다면, 응오딘지엠 정권이 호아하오교 군벌들을 토벌할 때 지역민들이 호아하오군을 지원할 정도로 민심을 보존할 수 있었을까? 팜꽁탁의 망명 때문에 호아하오교보다 상대적으로 덜 반정부적이던 까오다이교 쪽 국민들도 정부에 큰 반감을 보였다. 응우옌타인프엉 장군이 민심을 잃은 건 프랑스와 협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승이자 교주 팜꽁탁을 지엠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공격한 바보짓 때문일 뿐이다.
6.1.1. 반론
일단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지의 독립 운동 세력과 제국 본토의 세력과의 협력 관계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기에 제국 본토 세력과 손을 잡은 세력=독립운동에서 정당성이 없는 세력이라는 논리가 성립하지가 않는다. 당장 위의 베트민의 부역을 비판하면서 예시로 든 레꽝빈(바꿋)도 프랑스와 협력과 적대를 왔다갔다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 예시대로면 레꽝빈도 베트민처럼 프랑스 부역세력으로 비판해야 앞뒤가 맞지 않는가?베트남은 식민 지배국인 프랑스가 자국의 식민지 지배층들을 프랑스식으로 교육시키는 데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운동 세력이 정작 독립 이후에는 이런 프랑스의 교육 네트워크를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지되었고 영국의 인도 식민지도 간디, 네루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반목과 협력을 반복하는 복잡한 관계였다. 한국에서 다른 식민지 지배 문제를 이해할 때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다른 열강의 식민지 지배와 비교했을 때 예외에 속하는 사례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15][16]
그리고 이런 베트민의 '만행'에 대해 자료로 가져오는 1차 자료들 상당수는 베트민과 적대하던 세력의 증언에서 나온 것들인데, 증언 내용들 중 진실과 거짓[17]이 섞여서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데, 이라크 망명자 그룹이 사담 후세인이 핵무장을 하고 있다고 거짓진술하여 이라크 전쟁이 벌어진 거라던가, 베네수엘라 반 마두로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장하다가 실패한 사례 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독립세력간의 노선 갈등으로 인한 피의 대립은 막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상당수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다. 베트민의 다른 독립세력 숙청은 해방 이후 다른 여러 식민지 국가들이 그러했듯, 독립 세력간 이념 노선갈등으로 인한 것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적잖은 피난민들이 남베트남으로 월남할 당시 미국은 이를 도왔었는데,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 랜스데일 주도로 CIA는 흑색선전을 실행했다. 당연히 여기에는 호치민의 북베트남과 베트민에 대한 악마화가 목적이었다.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가 가톨릭 교도들에게 하지도 않은 짓을 마치 한 것 처럼 선전선동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극우 언론들은 이를 마치 사실인것 처럼 보도했다. 랜스데일 휘하에서 미국의 흑색작전에 참가했던 둘리(Dooley)는 책에서 베트민이 아이들 몇 명을 교실 밖으로 끌고 나와 고막에 젓가락을 쑤셔넣는 이야기를 묘사하기도 했다. 베트민이 그렇게 했다는 이유도 황당무계한데, 그 이유는 아이들이 종교 수업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반역으로 고발되어 이런 처벌을 받았다는 것. 심지어 종교수업을 한 교사는 그런 수업을 했다고 혀가 뽑히는 고문을 당했다고.... 물론 이는 둘리가 지어낸 얘기였다. 관련자료
설령 베트민 세력의 이런저런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베트남에서 디엔비엔푸 전투 하나만으로도 베트민의 통치 정당성을 넘볼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그 어떤 베트남 독립 운동 세력 중에서도 이 전투와 비슷하거나 뛰어넘는 전과를 올리는 데 성공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18]
또한 위 본문에서 베트민을 비난하기 위해 인용된 것들을 토대로 베트민의 이념 노선 갈등을 프랑스랑 협력한 세력으로 간주한다면,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나 해공 신익희가 해방 후 반탁운동 과정에서 친일파들의 일부분 지원을 받았고, 또 독립운동 과정과 해방정국에서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죽이고 탄압하기도 했다. 즉, 위의 베트민을 판단하는 기준대로 판단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 그리고 해공 신익희도 친일 매국노 혹은 친일 매국노 집단이라는 논리는 더더욱 성립 가능하다.
1945년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논의가 국내에 오보로 보도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더불어 반탁투쟁을 열렬히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세력으로 대표되는 한국민주당의 지원을 받았으며, 테러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북청년단의 실질적 수장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백범김구의 깨끗하지 못한 행적은 김상구씨의 저서 <김구 청문회>가 제법 잘 설명하고 있다. 물론 김구가 이러한 한계가 있다지만, 학계에서 백범 김구 그 자체를 친일 매국노로 판단하지는 안는다.
종합해보자면 베트민은 기존에 알려진 흠결 없는 정당성있는 통치 집단이라는 주장은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당시 북베트남에는 베트민 이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있었고 이들은 그들의 세력 내에서 지지를 받은 것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세력도 결국 베트민을 이기지 못했으며, 베트민이 디엔 비엔 푸 전투 등으로 계속 세력을 정비하고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할 때 다른 세력들은 이런 베트민의 행보를 제대로 저지하기는커녕 스스로의 내분으로 있던 정당성마저도 상실하는 악수를 계속 저질렀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공개한 펜타곤 페이퍼에도 1945년 기준으로 베트민이 남과 북 그리고 중부를 아우르는 대중적인 독립운동 단체라 적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베트민이 대중적이지 못한 집단으로 묘사하는 건 오류가 있는 서술이다. 베트민은 흠결이 전혀없는 정당한 정치 세력은 아니었지만, 다른 세력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으면서 집권 정당성을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단순히 독립 세력간 이념 갈등과 노선갈등으로 인한 일을 가지고 매국노 집단으로 몰 수는 없는 것이다.
7. 미군이 북베트남으로 북진을 했으면 이길 수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요약하자면 그런 거 없다. 설령 점령한다 하더라도 유지할 수도 없고, 점령 단계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대개 이러한 오해가 생기는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베트콩, 북베트남군과의 압도적인 교환비가 공개되고 나서 일부 보수적 미군 관련 인사들이 주장하는 '미군은 최선을 다했는데 핵전쟁 확전을 두려워한 겁쟁이 정치인들이 결단을 못 내려서 망했다.' 수준의 북진론을 무분별적으로 수용한 것과 냉전이 끝난 이후 한국 밀리터리 커뮤니티에서 게릴라전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도가 약해져서인데, 당장 대규모 정규전인 독소전쟁부터가 독일군의 압도적인 교환비로 소련군에게 피해를 강요했지만 전쟁은 오히려 패배한 것에서 보듯, 교환비는 전략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특히 게릴라전은 일반적인 군사작전보다 정치적 여론이 더 중요한 전쟁으로, 점령지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점령군은 현지 게릴라보다 더 낮은 수준의 폭정을 저질러도 점령지 현지 여론 지지도가 현격하게 떨어지며, 게릴라는 점령지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 만으로도 점령군에 대한 적대감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즉 점령군이 게릴라전에서 이길려면 현지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치안 및 행정업무가 원할이 돌아야 하고, 게릴라와 현지 촌락의 접촉을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등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미군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지원해 줘야 할 남베트남 정권은 잦은 쿠테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마비된 상태였고 그나마 현지 사정을 이해하던 실무진의 의견은 미국이나 남베트남 수뇌부가 무시해버렸다.
당시 미국 정부는 악화되어가는 전쟁 상황을 국민들에게 숨기는 데 급급했으며, 미군 일반 병사들은 일선과 현장의 괴리, 그리고 잘못된 대민 정책 수립 등으로 인해 비우호적인 현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임무 수행 능력이 바닥나고 있었고 남베트남 정권은 잦은 쿠테타로 인한 정국 불안정으로 인해 게릴라전이 일어나는 지방을 보호할 능력이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진을 한다고 해 봐야 남베트남의 게릴라를 소멸시킬 수 없을 뿐더러, 북베트남은 이런 저런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20] 최소한 남베트남에 비하면 정권 지지기반이 안정적이었므로 전선만 더 커졌을 뿐, 오히려 군사적 소모만 더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실제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으로 전선이 확장되지도 않고 그저 남베트남만 지키려고 시도했는데도 미군의 전사자만 5만이 넘었다. 가뜩이나 막장군대로 유명한 남베트남군 때문에 사실상 대부분의 공세부분을 담당해야 하는 처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이 북진했을 때 그 전사자는 얼마나 폭증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다.[21] 무엇보다도 미국이 북진하면 당시 소련과 중국이 가만히 있었을까? 자칫하다가는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치인들이 겁쟁이거나 멍청이라서 북베트남 북진을 포기한 게 아니다. 미국이 세운 베트남전의 전략적 목표는 남베트남 정권의 안정이었으며, 북베트남의 멸망은 전략전술적으로 도움을 주기 매우 어렵다.[22] 게다가 남베트남 전쟁에서 들어가는 전쟁 비용 때문에 미국의 경제가 악화되고 사회 분위기도 개판이 난 시점에서 최소 비슷한 비용이 들어갈 북베트남 침공전에 들어갈 전비부터가 아무리 미국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점령조차도 쉬운 게 아닌데,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보이지만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달만의 적군을 무너트려도 이후 점령 단계에서 현지 민심의 이반과 잔존세력 소탕 실패로 인해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점령지 대부분을 사실상 상실하고 반군에게 넘겨주고 친미세력이 장악한 도시나 미군 기지에 갇혀버리게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심지어 이들 무자헤딘들은 장비도 복제 AK 수준으로 조악하고 조직력도 부족한 무장집단 수준이었지만 당시 북베트남군은 이전 프랑스군과의 교전에서 얻은 경험과 소련, 중국의 지원을 받은 유격전에 능한 군대였고,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의 전투능력은 기술력의 한계와 낮아진 사기로 인해 21세기의 미군과 비교하면 상당히 부족한 수준이라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점령 단계에서 더 큰 출혈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결국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미군이 이길 수는 있어도, 치안과 행정이 병행이 되는 점령전에서는 기껏 전투에서 이기고 얻은 점령지를 치솟는 유지 비용[23] 때문에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빈발한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상황은 50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서도 남베트남 내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콩들을 소탕하는 데 실패했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농촌지역에서 민심을 사로잡는데 철저히 실패했다. 태생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적 유산을 토대로 탄생한 남베트남에서도, 내부평정 계획이 번번히 실패했는데, 비록 유혈적 희생은 있었지만 토지개혁과 단기간의 사회주의적 생산기반을 마련한 북베트남에서 미군이 진격하여 내부평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의 북진 시 중국이나 소련이 참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북베트남 지도부는 과거 항불전쟁 시기 프랑스군을 상대로 북부에서 게릴라전을 경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승리를 이룩한 집단이었다. 즉 쉽게 무너질 세력들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남베트남 내부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진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는 중국의 참전을 배제한 상황에서의 이야기고, 6.25 전쟁 당시를 생각하면 실제로 북베트남을 침공했을 경우 중국이 참전을 하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이런 식으로 전술적 승리만 해 봐야 전략적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수십 년 뒤, 소련 스스로가 전쟁을 일으키다가 소련 그 자신을 무너트린 아프가니스탄에서 스스로 증명했으며, 정작 미국 스스로조차 이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망각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8.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숙청당했다?
이들(베트콩이나 괴뢰 남베트남 공산정부 출신들)이 이후 통일 베트남에서 숙청당했다는 설이 정훈교육에서 보이는데 답부터 말하면 절반만 진실이다. 일단 구정 공세 이후에는 베트콩 주력은 남베트남인이 아니라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 이후 베트콩들은 원래부터 북베트남 출신인데 그들을 숙청할 리가 없었다. 북부출신이 아니더라도 괴뢰정부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각료들은 주로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친공산계 명사들이었는데, 위의 응우옌흐우토는 통일 베트남에서 국가주석(1981~1982)까지 지냈고(실권은 없었지만), 부주석도 지내고 1990년대에 사망한 걸 보면, 모두 숙청된 건 아님을 알 수 있다.그러나 베트콩 정부의 군대는 북에서 내려온 북베트남군 계열과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자생적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는데, 68년 구정 공세로 베트콩 군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도 비공산주의, 민족주의 계열 부대는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었다. 이들 " 민족주의" 계열의 군대와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활동가"로 베트콩 정부에 몸 담았던 이들은 실제로 남베트남 패망 이후 노선 차이로 인해 숙청되었으므로 일부는 맞다고 볼 수 있다.[24] 그런데 저렇게 북에서 남파된 인원들도 순수하게 남베트남 현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든 게, 애초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남북 베트남의 분단까지 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호찌민을 비롯한 무수한 혁명가들의 고향이며, 1930년 응에안 소비에트 봉기로 민족 혁명의 성지로 추앙 받았던 베트남 중부의 응에안, 하띤 성 다음으로 사이공 소비에트를 비롯한 남베트남의 산업 도시들이 가장 크고 강했다. 이들 중 다수는 남북베트남이 분단되자 북베트남으로 월북하였다가 60년대 초 북베트남측에서 대남 전쟁 개전 이후 다시 하노이에서 재월남 시킨 경우이다. 즉 원래 뿌리나 출신도 남베트남인데, 50년대~60년대를 북베트남에서 보내다가 전황이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변하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경우가 다수인지라 "원래 남베트남인들의 자생적 조직이었던 해방전선이 북베트남 정권에게 집어 먹혔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한국으로 치면 원래 좌익 성향이 강했던 영남 지방 출신의 남로당원들이 한 번 북쪽으로 올라가 정권 내에서 자리를 굳히다가 다시 남파된 경우란 의미다.[25]
남북베트남 사이에 오래된 역사적, 문화적, 기질적 차이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들어서 서로를 아예 이질적인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통일 전쟁이 아닌 서로에 대한 분리를 주장했던 주요 정치 세력은 소수민족들 제외하고 하노이측이든, 사이공측이든 베트남 전쟁 기간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군사적 분석을 넘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심도 있는 정치적, 역사적 분석과 이해를 위해서는 이렇게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 중심의 관점 뿐만 아니라 베트남 현지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감안하면 1920년대 대불 독립 운동가들의 세대 교체 시절부터 유기적으로 현지 사정에 맞추어 발전해 온 베트남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과 이들이 설립한 월맹 정부의 성격이 딱 이렇다 규정 짓기에는 복잡한 게 너무 많다.
민족해방전선에서 수립한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법무장관을 지낸 쯔엉니으탕(Trương Như Tảng) 등 민족해방전선 조직원 중에서 실제로 숙청당한 사람도 있고 즈엉꾸인호아(Dương Quỳnh Hoa)처럼 숙청은 당하지 않았지만 통일 베트남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일부가 숙청되긴 했지만 대다수의 민족해방전선 구성원들은 통일 이후에도 큰 불이익이나 큰 문제를 겪지 않고 통일 베트남에서 살았다. 민족해방전선 말단 회원 대다수는 숙청당하지 않았다. 북부 출신에 비해 통일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옛 민족해방전선의 간부 중에서도 90년대나 심지어 2000년대까지 통일 베트남의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들이 있다.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수반을 지낸 응우옌흐우토(Nguyễn Hữu Thọ)[26]는 통일 이후에도 1992년까지 통일 베트남의 부주석을 지냈다. 같은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응우옌티빈(Nguyễn Thị Bình)도 통일 베트남에서 1992년부터 2002년까지 부주석을 지냈다. 이외에도 민족해방전선 간부 중에서 통일 베트남의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은 여럿이다. 심지어 베트콩 고위간부이면서 간첩 노릇을 하였던 ' 남베트남 불교도 위기사태'의 주동자 중 한 명인 틱티엔하오(Thich Thien Hao)스님은 종교인임에도 통일 베트남에서 숙청은커녕 공산주의 정권이 유일하게 승인한 ‘베트남불교승가협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이후 1997년에 86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입적했다.
사실 1976년 베트남 통일 이후 민족해방전선 출신들은 북한의 남로당 출신들과 달리 숙청당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27]
결론은 전쟁 승리 후 북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정책은 " 토사구팽"이라기 보다는 " 갈라치기를 통한 길들이기"로 보는 것이 진상에 가깝다라고 할 수 있다.
9.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저항조직이었다?
물론 극초기에 응오딘지엠에게 숙청당한 종교파 세력 일부가 궁지에 몰려 베트콩에 참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베트콩 구성원은 남베트남으로 남파되어 베트남 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하부조직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진짜로 남베트남의 자발적인 조직이었다면 베트콩의 이러한 민간인 학살, 탄압 행위들이 설명될 수 없다.베트남국이나 베트남 공화국 정권에 맞선 남베트남인 스스로의 저항조직이라면 차라리 종교파의 반정부 연립조직 연합전선 쪽이 가까울 것이다. 베트민이나 베트콩은 오히려 초반엔 종교파 군벌, 후반엔 베트남 공화국 민병대 같은 남베트남인들 스스로의 군대가 저항하는 억압자에 가까웠다.
또한 남베트남계 군이었던 4개 사단은 (승전 후) 자고 일어나니 모두 해체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10. 보트피플들은 남베트남의 기득권층이었다?
이런 오해 때문에 해적의 타겟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실제로 남베트남의 기득권층이 많이 포함되어있던 집단은 75년 패망 직후 탈출한 13만명 정도의 사람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미국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곧 미군에게 구조되었다.
저렇게 먼저 탈출한 사람들을 따라 다른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피해 마찬가지로 베트남을 탈출했고, 이들이 바로 좁은 의미의 보트피플이다. 이들은 숫적으로 베트남계 난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오히려 저런 오해랑은 반대로 저소득층, 저학력층으로 구성된 사람들이다. 당초에 부유했던 사람들이라면 저렇게 보트를 타고 목숨걸고 탈출했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28] 또한 빈자라고 해서 꼭 공산주의 체제에 동조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 더군다나 저런 상황은 전쟁이나 난민들이 발생할 때 으레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그리 놀랄만한 것도 아니다. 츨처 즉, 저 해적들이 저런 소문을 듣고 보트피플을 털었다고 해도 얻는 건 별로 없었을 것이다.[29]
11. 관련 문서
[1]
미군뿐만 아니라 한국군도 북베트남 정규군과 교전한 사례가 있다.
[2]
북베트남에서 없던 이유는 이들이 모두 베트남 공산당의 폭압 아래 숙청당하거나 남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3]
북베트남이 더 인구가 많았고, 북베트남은 이미 공산당 일당독재국가였기에 얼마든지 자기네 쪽 표심을 조작할 수 있었으며, 이미 해방 초기부터 수많은 테러와 잔혹한 폭력행위를 벌여왔기에 남베트남에서도 선거 사보타주를 벌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당한 이유와 부당한 이유가 모두 섞인 것이다.
[4]
물론, 이러한 논리가 베트남에서만 쓰이진 않았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명목상으로나마 합법 정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의 UN 주관 총선거의 거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비단 해당 논리가 제안한 대상이 공산당이어서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실질적으로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을 엄연한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점과 북한에서 이 점으로 인하여 정통성과 관련하여 내부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던 점을 봤을 때, 이러한 논리는 총선거를 거부한 쪽에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제안한 쪽이 내부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5]
응오딘지엠 친위세력, 친정부 종교파 혁명위, 반정부 종교파 연합전선 전부 다.
[6]
물론 1인당 GDP도 별로 차이가 나진 않았고, 베트남 전쟁 막판에는 아주 약간의 차이로 북베트남이 앞서게 된다. 특별히 누가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게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
[7]
당시 남베트남은 지지리 가난했던 1960년대 대한민국보다도 가난했다.
[8]
물론 이건 대한민국도 원조의 혜택을 상당히 받긴 했다. 사실 당시 미국과 소련 모두 체제경쟁의 차원으로 적극적으로 남북한에게 각각 막대한 원조를 퍼부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대한민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원조의 의존도를 점차 줄여나갔다. 물론 그래도 해외 자본의 필요성은 여전했던지라 그 대신
베트남 전쟁 참전과
한일협정 등을 통해 자본을 유치했다.
[9]
통일 이후 베트남 정부가 남부에서 사회주의화 시기에 벌인 삽질과 미국의 경제 제재가 없었을 테니. 더군나나 통일 베트남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이 1986년
도이모이이다. 남베트남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도입했다. 그럼에도 남베트남 정부가 무능했기에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고도 조금 나을 수준 정도밖에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10]
남베트남이 가톨릭을 사실상 국교로 지정한 일은 한국으로 치면 일본의 국가신토 및 젠불교를 사실상 국교로 지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11]
다만 종교 탄압은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에만 시행되었지,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1963년 쿠데타의 원인 중 하나가 응오딘지엠 정부의 불교 탄압이었고 이후 군사정권과 제2공화국에서는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의 삽질을 흑역사로 취급하였다.
[12]
#
[13]
사실 이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북베트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14]
https://gall.dcinside.com/m/war/1634011
[15]
일본은 한국에 대해 식민지 지식인들을 식민지 지배 기구의 최상위층으로 편입하려는 시도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일제 말 친일로 전향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이 계속 나왔음에도 이 기조가 계속 유지되었을 정도.
[16]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 내 반제국, 반군국주의적인 일본 인사들과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이 연계하는 등 한국에서도 제한적이지만 일본 내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의 연계는 약소하지만 존재했다.
[17]
의도적인 거짓말 뿐 아니라 증인들이 사실관계를 잘못 알고 증언하는 것을 포함한다.
[18]
당장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이후 남베트남의 지도부나 정치집단이 되는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 것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후 프랑스와 프랑스령 식민지의 반식민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
전쟁의 미래
[20]
호치민도 자기 정책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숙청하는 등 북베트남 공산 정권도 정권을 잡는 동안 내부적 문제가 없던 건 아니었다.
[21]
다만 미군의 전사자가 5만이 넘은 것은 그 전쟁의 특성상 20여년의 세월동안 베트콩 게릴라들을 상대로 두더지잡기식의 끝이 없는 교전으로 피해가 계속 누적된것임을 고려해야한다. 북베트남을 상대로 기존의 베트공 소탕과는 다른 전면적인 공세로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으면서 진공해 들어가 북베트남 주요영토를 일시 점령하는 것 까지만 한정하면 의외로 적은 피해로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미군이 진공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직한 힘겨루기를 북베트남군이 해줄리가 없고, 이전의 프랑스를 상대하듯 가급적으로 전면전은 피하다가 미군이 장악한 군사거점 및 도시들을 계속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전을 전개해 나가면서 야금야금 미군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면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을 상대하는 것과는 또다른 지옥이 펼쳐진다. 미국의 성공작이었던 걸프전과 졸작이었던 아프간전의 가장 큰 차이중 하나가 전자는 이라크군에 대한 섬멸 및 격퇴전이었지만 후자는 탈레반을 몰아내는 것에서 끝이 아닌, 아프간 영토를 점령 및 유지하는 전쟁이었음을 상기해보자.
[22]
북베트남만 해도 중국과 소련이라는 물주가 있고, 동남아에는 호치민 루트가 뚫린 이상 북베트남으로 전선만 확대해 봐야 통제 불가능한 점령지만 늘어날 뿐, 전황을 바꾸진 못하며, 오히려 더 많은 군비를 지출하느라 타격이 커질 수 있다.
[23]
이 유지비용에는 당연히 점령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력의 인적 손실도 포함된다.
[24]
당장 남베트남 공산화 이후 재판도 없이 학살된 사람이 최소 6만 5천에서 최대 10만이나 된다. 남베트남에서 공산화 이전 체제에 적극 충성하여 숙청될 게 뻔한 사람들은 대부분 해외로 도망가거나 항복을 거부하고 죽었으니 이들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북베트남에 장차 위협이 될 지도 모르는 자들이 누굴지는 뻔한 이야기다.
[25]
이와 정반대로 응오딘지엠 집권 이전까지 세속주의 계열 반공주의의 핵심이었던 베트남 국민당이나 대월당은 원래 본거지가 하노이였다. 그러다가 30년대~50년대까지 거듭된 공산당의 폭압과 독재에 못 이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다른 반공 내셔널리즘 세력들과 합류하게 된다.
[26]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출신
[27]
다만 이 속설은 정작 46년 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친탈레반 행위를 한 자들과 항복한 자들까지 무차별 학살하면서 진짜가 된다. 물론 탈레반이 북베트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장이긴 했다.
[28]
당장 부유한 베트남인들은 주로 중국계거나 지엠 시절 기득권층이었다. 이들은 구미권,홍콩,싱가포르 등지로 탈출했다.
[29]
다만 보트피플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인신매매로 팔아버린 사례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