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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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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5년 5월 22일
경상도 김해군
(現 경상남도 김해시)
사망 1970년 5월 12일 (향년 74세)
묘소
본관
가족
학력
서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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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895년 5월 22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김해면(金海面) 답곡리(畓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이명은 배대수(裵大秀)이다. 1919년 김해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지역 청년회, 신간회 등 국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배동석(裵東奭)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인 김해로 내려오자 임학찬(任學瓚)·송세희(宋世禧) 등과 여러 차례 비밀리에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거사일인 3월 30일 밤 9시에는 김해면 중앙거리에서 7명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답곡리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한 후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그해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지만,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동일한 형량인 징역 6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0년 김해청년회가 결성될 때 참여하였으며, 1921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제2차 정기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0월 서울청년회 소속 최창익(崔昌益)을 구타한 ‘장안여관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북성회(北星會)와 서울청년회 간의 알력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김약수(金若水)와 함께 징역 5월을 받았다. 출옥 후 1924년 11월 25일 경성부(京城府) 제동(齊洞)에서 김약수와 함께 북풍회(北風會)를 새로 조직하여 사회주의 세력을 모으고자 힘썼다. 일본에서 결성된 사상단체인 북성회를 기반으로 결성된 북풍회는 일본의 사회주의운동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내 순회강연 및 노동·청년단체 조직과 지원 등의 대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였으나 당 중앙 개편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당되었다. 1925년 11월에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북풍회·화요회(火曜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의 4단체 합동운동을 추진하였고, 서울청년회 측과 교섭을 벌이며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힘썼다.

1926년 4월 정우회(政友會)가 결성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사회주의 잡지인 『해방운동』 속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공산주의 활동과 조선공산당 관련으로 인해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13일 긴 조사와 재판결과 무죄로 출옥하였다.

1929년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 임원선거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30년 9월 조선일보 부산지국장을 역임하던 중 용산경찰서의 비밀결사 활동 수사로 8월 27일 붙잡혔다가 한달 가까이 조사를 받고 9월 25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