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14:20:55

방훈의 난

당나라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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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반란의 전개
3.1. 조정과 현지 절도사들의 회유 시도와 실패3.2. 반란의 확대3.3. 사주 공방전3.4. 관군의 반격3.5. 반란 진압
4. 반성하지 않는 조정

1. 개요

당나라 제17대 황제 당의종 시기인 868년 서주 무녕군 군인인 방훈(龐勛)이 일으킨 반란. 당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반란 중 하나이다.

2. 배경

안사의 난 이래, 당나라 각지에 수많은 번진이 난립했다. 각지의 절도사들이 번진을 장악한 뒤 조정에 반항하면서, 당나라의 혼란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당헌종은 정부에 반항하는 번진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중앙의 고관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절도사들은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승진을 위한 단계로 여기고 부임지에서의 통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로지 감군으로 파견된 환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막대한 재물을 '진봉'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에 바쳤다. 진봉(進奉)은 번진에서 경비로 쓰고 남은 잉여 재원을 중앙에 반환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병사에 대한 급여를 유용하고, 현지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매겨 착취하는 등 온갖 수탈을 자행했다.

장병들은 절도사가 경비를 자꾸만 삭감하면서 급료가 대폭 줄어드는 것에 불만을 품고, 종종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축출하고 자기들과 적성이 맞는 절도사를 추대했다. 한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는 절도사들도 있었다. 서주, 사주, 숙주, 호주의 4주를 지배했던 무녕군 번진은 바로 후자에 해당했다. 왕지흥이 서주에서 용맹하고 사나운 병사 2천 명을 모아서 7군을 편성한 이래, 이 일대의 장병들은 여러 특권을 부여받았고, 절도사들은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장병들은 교만해져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 남자가 크게 소리치고 무리가 모두 화답하니, 절도사는 번번이 후문에서부터 달아났다. 절도사 전모가 그들과 더불어 섞여 앉아서 술을 마시고 팔을 잡고 등을 두드렸다. 한 병사가 판을 잡고 노래를 하였는데, 호사 비용이 매일 1만 전으로 계산되었다. 또, 절도사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더울 때마다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온갖 요구를 퍼부었다.

급기야 862년 7월, 서주의 장병들이 신임 무녕군 절도사 온장을 축출해 버렸다. 온장은 엄격한 관리라는 평판이 있었기에, 자기들의 비위를 맞춰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온장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고 빈녕 절도사로 삼고, 절동 관찰사 왕식을 무녕군 절도사로 삼았다. 앞서 구보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웠던 왕식은 충무, 의성 두 진에서 차출한 부대를 함께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서주에 이르자, 교만한 병사들은 매우 두려워 했다.

862년 8월, 왕식은 대팽관에 도착한 뒤 충무, 의성의 장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진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이때 그들이 돌아가기 위해 갑옷을 두르고 무기를 잡자, 왕식은 돌연 이들을 이끌고 절도사들을 허구헌 날 내쫓는 서주의 교만한 병사들을 포위하도록 명령한 뒤 죄다 죽여버렸다. 이로 인해 은도의 도장 소택 등 수천 명이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산속에 숨어서 비적이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한 달 내에 자수하는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회유했다.

그 후 남조가 교지를 공략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주, 사주의 2주 일대의 3천여 장병을 모집하여 남조 방위의 최전방 지역인 옹주로 파견했다. 이는 남조의 거듭되는 침략을 막는 한편, 비적화된 서주의 교병들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집에 응한 인원은 2천 명이었고, 그 중 800명이 계주로 이동했다. 그들은 3년에 한 번씩 교체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6년째 계주에 있는데도 교체해주지 않자, 서주 교병들은 "이미 6년이 되었으니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서사관찰사 최언증은 군대의 창고가 텅 비었고 군사를 발동한 비용이 많기 때문에 1년 더 머물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은 이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868년 7월 허길 등이 난을 일으켜 도장 왕중보를 죽이고, 양료 판관 방훈(龐勛)을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방훈의 난이 발발했다.

3. 반란의 전개

3.1. 조정과 현지 절도사들의 회유 시도와 실패

방훈의 반란군은 부고에 있는 무기를 약탈하고 지나가는 곳을 약탈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8월에 장경사를 파견하여 그들의 죄를 사면하고 전부 서주로 호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방훈 등은 일단 약탈을 중단하고 호남으로 향했다. 감군이 방훈을 유혹하여 그의 갑병을 모두 보내게 하였고, 산남동도 절도사 최현이 군사를 엄히 하여 요해를 지키니, 서주 교병들은 감히 경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배를 띄워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렸다. 이에 반란의 주동자 허길 등이 서로 모의했다.
"우리들의 죄는 은도보다 크지만 조정에서 이를 사면한 까닭은 연도에서 공격하고 겁탈하거나 혹은 붕궤되어 해산하여 걱정거리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니, 만약에 서주에 도착하게 되면 반드시 젓 담가질 것이다."

그들은 각기 사재로 갑옷과 무기, 그리고 기치(旗幟)를 만들고, 절서를 지나서 회남으로 이르렀다. 회남절도사 영호도가 사자를 파견해 위로하고 꿀과 쌀을 주자, 도압아 이상이 진언했다.
"서주의 병졸들이 멋대로 돌아오니, 형세로 보아서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인데, 비록 주살하고 토벌하라는 칙령이 없다고 하여도 번진의 대신은 당연히 사건에 다가가서 적당하게 통제해야 합니다. 고우의 하안은 골짜기이며 물을 깊고 좁으니, 청컨대 기습병을 그 옆에 매복시키고 적주를 불태워서 그 앞을 막으면서 강한 군사로 그 뒤를 압박하면 다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들을 풀어 내버려 두어 회하를 건널 수 있게 하여 서주에 이르러 원한을 맺고 분해하는 무리들과 합치게 된다면, 걱정거리는 반드시 클 것입니다."

평소에 나약하다는 평판이 있던 영호도는 진압하라는 칙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들은 회남에 있으면서 포악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스스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나의 업무가 아니오."

방훈은 은도 등을 불러 모아서 모두 숨기고, 여러 망명한 사람은 배 안에 숨겼는데, 그 무리는 1천 명에 이르렀다. 7월 27일 사주에 이르렀을 때, 자사 두도가 이들에게 구장에서 향응을 베풀고 우인들이 치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서주 병졸들은 자기들을 놀리는 것으로 여기고 우인들을 잡아서 목 베려고 하니,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졌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최언증에게 멋대로 돌아오는 병사들을 위무하며 걱정하거나 의심을 품지 말게 하였다. 최언증은 이에 따라 사자를 파견하여 방훈 일당에게 "황제의 뜻을 받들라"고 요구했다. 방훈은 즉시 공손한 자세로 최언증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7월 28일 서성에 이르렀을 때, 방훈과 허길 등은 무리들에게 반란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우리들이 마침내 멋대로 돌아오는 것은 처자식을 보려고 생각한 것뿐이다. 지금 듣건대 이미 비밀의 칙령이 본군에 내려왔고, 도착하면 갈기갈기 찢기어 멸족될 것이라 한다. 장부가 쳐놓은 그물에 걸린다면 천하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인데, 어찌 서로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탕화로 달려가서 뛰어 드는 것이 어찌 다만 화란을 벗어나는 것뿐이랴! 아울러 부귀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성 안에 있는 장사들은 모두 우리의 부형과 자제들인데, 우리가 밖에서 외치면 저들은 반드시 안에서 호응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왕시중(왕지흥)이 옛날에 하였던 일을 준수한다면, 50만 전의 상으로 주는 돈은 발뒤꿈치를 들고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무리들이 모두 환호하고 뛰면서 훌륭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장사 조무 등 12명은 두려운 마음에 도망하고자 했다. 이에 방훈은 조무 등 12명의 목을 베고 수급을 최언증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 방훈 등은 멀리 수 자리를 선 지 6년에 실제로 고향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조무 등이 무리들의 마음이 불안한 것을 이용하여 갑자기 간계를 싹틔웠습니다. 장사들은 진실로 잘못된 것을 아는데, 감히 주멸되는 것을 피하겠습니까? 지금은 이미 은혜를 입어서 전부 용서받았으니, 문득 함께 으뜸가는 악한을 주멸하여 잘못된 허물을 메우고자 합니다."

하지만 최언증은 사자의 말을 믿지 않고 잡아 신문해 정황을 모두 파악했다. 10월 7일 방훈이 다시 채중을 보내 상황을 신고하며 알렸다.
"장사들은 스스로 죄를 지었지만 각자 걱정과 의심을 품고 있어서 지금 이미 부리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갑옷을 벗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군장인 윤감, 두장, 서행검 등이 교활하게 속이고 많이 의심하여 반드시 틈과 간격이 생길 것이니, 빌건대 이 세 사람의 직임을 정지시키시어 무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시고, 이어서 빌건대 수자리에서 돌아온 장사들을 별도로 두 개의 영채에 두시고 합하여 한 명의 장수를 두십시오."

이때 서주의 장병들이 팽성에 이르러 네 개의 역에 주둔하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최언증이 제장을 불러서 이 문제를 논의하자, 제장이 울며 말했다.
"최근에 은도의 흉측스럽고 사나운 것 때문에 한 개의 군이 모두 악명을 받아서 섬멸되거나 유리하다가 숨었으니, 억울하고 남용된 것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억울하게 아프다는 소리가 아직 그치지 않앗는데, 계주의 수졸들이 다시 이처럼 미쳐 날뛰고 있으니, 만약에 멋대로 놓아두어 성으로 들어오게 한다면 반드시 거역하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이와 같이 하면 전 경계 안에 있는 땅에서는 시체가 땅에 뒹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먼 길을 와서 피곤하고 해이해진 틈을 타서 군사를 발동하여 그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하며, 우리는 편안한 상태이고 저쪽은 수고로운 상태이니 승리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언증은 미적미적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이에 단련판관 온정호가 다시 간했다.
"안위의 조짐은 이미 눈앞에 와 있으며, 득실의 기회도 오늘에 결정됩니다. 지금 그들을 치는 것은 세 가지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내버려 두면 다섯 가지의 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죄를 풀어주고 나서 멋대로 이를 죽이는 것은 첫 번째의 곤란한 것입니다. 그들의 부형을 인솔하여 자제를 토벌하니 두 번째의 어려움입니다. 가지가 되는 무리들이 연결되어 있으니 형벌로 죽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 세 번째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본도의 수졸이 멋대로 왔는데도 주살하지 않는다면 여러 도의 수졸들이 모두 이를 본받아 통제하여 막을 수 없으니 첫 번째 해로움입니다. 장군이란 한 군의 우두머리인데 별안간에 이를 감히 해쳤으니, 무릇 장군 된 사람이 어떻게 사졸들을 호령하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해로움입니다. 지나가는 곳에서 해롭게 하고 약탈하면서 스스로 갑병이라고 하면서 망명한 사람들을 불러 받아들였는데, 토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악한 것들을 징치하겠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 해로움입니다.

군대 안에 있는 장사는 모두 그들의 친속이고 은도의 나머지 산이나 소택지대로 숨어 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안팎에서 함께 일어나면 어떻게 지탱하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해로움입니다. 군부를 압박하고 위협하여 꺼리는 세 명의 장수를 죽이고 또 스스로 하나의 영채를 만들려고 하니, 이를 좇는다면 이를 빙자하여 난을 일으키는 실마리를 만들려고 할 것이니 다섯 번째의 해로움입니다. 오직 밝으신 공께서 그 세 가지의 어려움을 제거하고 그 다섯 가지의 해로움을 끊고, 일찍 큰 계책을 확정하여 여러 사람의 바람에 부응하십시오."

마침내 최언증은 도우후 원밀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방훈을 토벌하게 했다. 이어서 숙주에 명령을 내려 부리의 군사를 출동하게 하고, 사주에서는 군사를 홍으로 출동하여 맞이하게 하고, 조정에 보고를 올려 방훈을 토벌할 뜻을 밝혔다. 이리하여 반란으로 확대되는 걸 막으려던 조정과 절도사들의 초기 대응은 실패하였고, 내란의 막이 올랐다.

3.2. 반란의 확대

868년 10월 8일 팽성을 출발한 원밀은 임산의 북쪽 몇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사를 주둔시킨 뒤, 장수들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할 계획을 논의했다. 그들은 반란군이 역참의 관사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를 풀어 치기로 하고, 한 사람을 나무꾼으로 분장한 뒤 땔감을 짊어지면서 반란군을 엿보게 했다. 해가 질 무렵, 반란군이 임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은 관사가 텅 비어 아무도 없고 공급해 주는 것도 없자 이를 의심했다. 그러다가 떌감을 짊어진 사람을 보자 곧바로 잡아서 매질을 한 끝에 관군의 계획을 모두 파악했다.

이에 방훈은 우인을 만들어 산 아래에도 늘어놓고 몰래 숨었다. 밤이 되었을 즈음에 관군은 비로소 적이 눈치챘음을 깨닫고 그들이 산골짜기와 샛길에 숨어서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서 성의 남쪽에 묵었다. 날이 밝자 다시 나아가 반란군을 뒤쫓았다. 이때 반란군은 이미 부리에 도착한 뒤, 숙주의 병사 500명을 상대로 수수에서 궤멸시키고 숙주에 이르렀다. 당시 숙주에는 자사가 궐석이어서 관찰부사 초로가 섭주사였는데, 성 안에는 남은 군사가 없어서 반란군이 10월 10일에 함락시켰고, 초로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반란군은 성 안에 있는 재화를 모두 모아서 백성에게 두루 나눠줬고, 이에 수많은 백성이 하루 동안에 몰려들어 반란군에 가담했다. 반란군은 사람을 뽑고 모집하여 병사로 삼았고, 원하지 않는 자의 목을 베었다. 그 결과 수천 명에 달하는 장정이 반란군을 따랐다. 이후 방훈은 스스로 병마유후로 칭하고 성의 수비를 강화했다. 이틀 후 관군이 도착했지만, 방비가 엄중해 다시 공격할 수 없었다.

12일에 원밀이 군사를 이끌고 물을 건너서 성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때 마침 큰 바람이 불자, 반란군은 화전으로 성 밖에 있는 초가집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불길이 관군의 병영까지 이어졌고, 사졸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반란군은 이 틈을 타 공격하였고, 관군은 크게 패해 300명이 죽었다.

이후 반란군은 성 안에 있는 큰 선박 300척을 약탈하고 물자와 양식을 실어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 강호로 들어가서 약탈하려 하였다. 1천 필의 비단을 장경사에게 주어서 기병을 파견하여 호송하여 변주의 동쪽 경계까지 가게 하고, 놓아줘서 서쪽으로 돌아가게 했다. 다음날 아침 반란군이 성을 이미 떠난 것을 알게 된 원밀 등은 추격하였으나, 사졸들이 모두 밥을 먹지 못했으므로 따라잡았을 즈음에는 이미 주리고 피곤하였다.

반란군은 제방 밑에 배를 정박시키고 제방 밖에 진을 치고 배 안에 1천 명을 매복해뒀다. 관군이 이르자, 진을 쳤던 반란군은 모두 비탈길로 도망했다. 원밀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여기고 군사를 풀어서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배 안에 숨어 있던 반란군이 뛰쳐나와 이들을 협공하여 오시부터 신시까지 공격하니, 관군이 대패했다. 원밀은 달아나다가 물에 빠졌고, 반란군이 이를 따라잡아 원밀 등 제장과 김진칙사(군사를 감독하는 환관)을 모두 죽였다. 이날 병사 천여 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반란군은 항복한 병졸들에게 팽성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계획을 물었다. 그들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비로소 팽성을 공격할 뜻을 품었다. 10월 15일 방훈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수수를 건너 산을 넘어서 팽성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비로소 원밀이 패배한 것을 알게 된 최언증은 문서를 이웃에 있는 도에 보내어 구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성문을 맡고 성 안에 있는 장정을 선발하여 수비하게 하였으나 다들 두려워하여 싸울 마음을 먹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최언증에게 연주로 달아나라고 권하자, 최언증은 분노하여 "내가 원수이니 성이 함락되면 죽는 것이 직책이다."라며 그 사람을 즉시 목 베었다.

이후 10월 17일 반란군이 성 아래에 이르러 무리 6천~7천명이 북을 울리며 시끄럽게 해서 땅을 흔들었다. 그들은 성밖에 사는 백성들을 위무하며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했다. 이에 사람들은 다투어 그들에게 귀부하였고, 반란군은 단시간에 나성을 공략했다. 이에 최언증은 자성을 지켰는데, 백성들은 반란군을 도와 이를 공격하면서, 풀을 실은 수레로 문을 막고 거기에 불을 질러 태우니 성이 함락되었다. 반란군은 최언증을 붙잡아 대팽관에 가두고, 윤감, 두장, 서행검을 잡아서 배를 가르고 조각조각 저몄으며, 그들의 가족을 다 없앴다.

방훈이 청사에 앉아 호위를 성대하게 늘어놓으니, 문무장리들이 엎드려 배알하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했다. 그날 성 안에서 반란에 가담한 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18일 방훈이 온정호를 불러서 절월(부절과 황월. 황제가 절도사에게 신표로 주는 것으로, 절도사를 시켜달라는 것이다.)을 요구하는 표문의 초안을 쓰게 하자, 온정호가 말했다.
"이번 일은 아주 큰 것이어서 경각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초안 잡게 하여 주십시오."

방훈이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 아침 방훈의 사자가 재촉하자, 온정호가 찾아와서 말했다.
"어제 즉각 거절하지 아니한 것은 한 번 처자를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미 처자와 결별(訣別: 죽음으로 헤어지는 것)하였으니, 삼가 와서 죽으려고 합니다."

방훈이 한참 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서생이 감히 이렇게 하다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나 방훈이 서주를 빼앗을 수 있었는데, 어찌 표문의 초안을 잡은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는 온정호를 풀어준 뒤, 매번 재주와 지략이 있다고 자부하는 주중이란 사람을 상객으로 삼아 표문의 초안을 쓰게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가지고 있는 이 하나의 군대는 바로 한 황실이 흥왕한 땅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절도사들이 군부를 각박하게 깎아먹고 형벌을 주고 상을 주는 것이 올바름을 잃었으며, 드디어 압박하여 내쫓기에 이르렀습니다. 폐하께서 그들의 통제권한을 뺏고 한 부대를 없앴는데, 혹은 죽거나 혹은 유배되어 억울하고 가로지른 것이 무수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본도에서 다시 죽이려고 한다고 하니, 장사들은 아프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신을 추대하여 권병마유호로 하였기에 10만 명의 군사를 억눌러서 네 주의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무하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이익을 보면 시기를 타는 것이 제왕의 자질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익을 보고 잃지 아니하였으며 시기를 만나서 의심하지 않았는데, 성스럽고 자비하신 분께 엎드려 빌건대 다시 정절을 내려 주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창을 휘두르거나 끌며 대궐에 가는 것이 늦지 않을 것입니다."

방훈은 압아 장관을 파견하여 장안으로 표문을 가지고 가게 한 뒤, 허길을 도우후로 삼고 조가립을 도유혁사로 삼아 여러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또 유행급을 파견하여 1,500명을 거느리고 호주에 주둔하게 하고, 이원은 2천 명을 거느리고 사주에 주둔하게 하며, 양비는 1천 명을 거느리고 숙주에 주둔하게 하고, 나머지 요해인 현과 진에서는 모두 수수를 완전하게 하였다. 이후 광, 채, 회, 절, 연, 운, 기, 밀의 여러 도적이 모두 배를 타고 오거나 도보로 달려와 가담하여 부곽에 차고 넘쳐서 열흘 사이에 쌀 한 말 값이 200전이 되었다.

방훈은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최언증이 "일군(서주에 있는 부대)는 포악한 졸병이니 다 잘라 없애야 하며, 다섯 현의 어리석은 백성은 각기 노예로 배속시켜야 한다"라는 표문을 쓴 것으로 조작하였다. 또 최언증의 표문을 승낙한다는 내용의 조서를 조작하여 서주 각지에 퍼트리자, 서주 사람들은 모두 조정을 원망했다.
"계주의 장사들이 창을 돌려 잡지 아니하였다면, 우리는 모두 도마 위의 어육이 되었을 것이다."

유행급이 군사를 이끌고 와구에 이르니, 길에는 따르는 사람이 배로 늘어났다. 호주의 군사는 겨우 수백 명이어서 자사 노망회는 어찌할 바 모르다가 마침내 성문을 열고 소고기와 술을 갖추어서 그들을 영접했다. 하지만 유행급은 성에 들어가자마자 노망회를 가두고, 스스로 행자사사를 칭했다. 사주 자사 두도는 방훈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수비를 완비하였고, 강, 회에 구원해주기를 요구했다. 반란군 장수 이원이 정에 병졸 100명을 파견하여 먼저 사주로 들어가 부고를 봉쇄하게 하니, 두도가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을 유인한 뒤 성으로 들어가게 한 후 모두 죽였다.

다음날 이원이 도착하여 성을 포위 공격하자, 두도와 장병들이 힘껏 항전해 적병 수백 명을 죽였다. 이에 이원은 철수하여 성의 서쪽에 주둔하였고, 방훈은 사주가 강, 회의 요충지에 해당하기에 반드시 함락시키기로 마음 먹고 병사를 더욱 보내 이를 공격하게 하니, 그 숫자가 1만에 이르렀으나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방훈이 임산에서 숙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고품 강도위를 파견하여 칙서를 싸가지고 가서 위무하게 하였다. 11월에 강도위가 팽성에 이르자, 방훈이 교외로 나가 영접하고 임산에서 자성까지 30리에 갑병을 크게 벌려 놓고, 호령하고 금고를 울리는 것이 산골짜기에 울려 퍼져서 진동하였고, 성 안에 있는 장정을 모두 몰아서 성 위에 올라가게 하였다.

방훈은 강도위를 위해 구장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여러 도적 가운데 항복한 사람이 수천 명이고, 여러 영채에서 승리하였다고 보고하는 것이 수십 명이라고 하였으며, 다시 절월을 요구하는 표문을 지어서 강도위로 하여금 조정으로 가지고 가게 하였다.

이 무렵, 신운경의 손자 신당이 광릉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임협을 좋아하여 쉰 살이 되어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두도와는 구면이었다. 방훈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주로 가서 두도에게 일가권속을 데리고 피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두도가 단호히 말했다.
"평안할 때에는 그 녹봉과 직위를 향유하다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성지를 포기하는 일은 나는 하지 않소. 또 사람이 각기 집안이 있는데 누군들 이를 아끼지 않겠소? 내가 홀로 살기를 찾는다면 어떻게 무리들을 편안하게 하겠소? 장사들과 이 성에서 함께 죽기로 서약하였소."

신당은 이에 감동하여 그와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광릉에 돌아와서 집안 식구들과 결별하고 11월 3일에 사주로 들어갔다. 그때 반란군이 이미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신당은 작은 배를 저어 성 안으로 몰래 들어갔고, 두도는 신당을 단련판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성내 주민들이 불안에 떨자, 도압아 이아가 무리를 인솔하고 북을 치고 떠들면서 사방으로 나아가 반란군을 급습했다. 이에 반란군이 물러나 서성에 주둔하니, 백성들의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서주의 이웃 도에서는 방훈이 서주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군사를 파견하여 요해를 점거했다. 그러나 관군의 숫자는 적고 반란군의 무리가 날로 많아져 관군이 자주 이기지 못했다. 반란군은 어대 근처에 있는 열 개의 현을 격파하였고, 승주 동쪽에 위치한 마산에 백성들이 도망가 숨으니 방훈이 장수 장현임을 파견하여 포위하였다. 마침 가물어서 산에 있는 샘이 말라버리자, 산 위에 숨었던 백성 수만 명이 갈증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방훈은 국기일에 향을 사르고 사졸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서쪽을 향하여 절하고 감사하게 했다. 그러던 중 칙사가 경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자, 반드시 정절을 하사항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즉시 칙사를 알현했다. 그러나 칙사는 최언증과 감군 장도근 만을 책망하고 그들의 관직을 깎아내렸을 뿐이었다. 방훈은 크게 실망하여 칙사를 가두고, 조정에 본격적으로 맞서기로 결심했다.

3.3. 사주 공방전

조정에서는 우금오 대장군 강승훈을 의성 절도사 서주행영도초토사로 삼고, 신무 대장군 왕안권을 서주북면행영초토사로 삼고, 우림 장군 대가사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로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크게 발동하여 방훈을 치게 했다. 강승훈은 사타족의 사자인 주야적심과 토욕혼, 달단, 글필의 추장에게 각기 무리를 인솔하고 자기를 따르게 해달라고 청하니, 당의종이 조서를 내려 허락했다.

방훈은 이원이 사주를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자, 오형을 파견하여 이원을 대신하게 했다. 11월 17일 다시 사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칙사 곽후본이 회남의 군사 1,500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려고 하여 홍택에 이르렀으나, 반란군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신당이 곽후본에게 가서 구원해주기를 요구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두도가 허락했다.

18일 밤, 신당은 작은 배를 타고 숨어서 회하를 건너서 홍택에 도착하여 곽후본에게 유세하였으나 듣지 않자, 밝을 즈음에 다시 돌아왔다. 20일에 반란군이 더욱 거세게 공격하면서 수문에 불을 지르려 하니, 성 안에서는 거의 막을 수 없었다. 신당이 다시 가서 구원해주기를 요구하겠다고 청했다. 이에 두도가 물엇다.
"앞서 갔다가 헛되이 돌아왔는데, 지금 가서 무슨 이익이 있겠소?"

신당이 말했다.
"이번에 가서 군사를 얻게 되면 살아서 오겠고, 얻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두도가 그와 울면서 헤어졌다. 신당은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문짝을 짊어지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곽후본을 만나 구원을 호소했다. 곽후본이 곧 그 말을 따르려 하였는데, 회남의 도장 원공변이 반대했다.
"역적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스스로 보위하는 것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소?"

신당이 칼을 꺼내어 눈을 부릅뜨고 원공변을 위협했다.
"도적들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함락되는 것이 조석일 것인데, 공은 조서를 받고 구원하려고 하면서 두류하며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 오직 위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뿐이겠소? 만약에 사주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회남은 드디어 야만인의 장소가 될 것인데, 공이 어찌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나는 마땅히 공을 죽이고 나서 그칠 뿐이오."

신당이 그를 죽이려 하자, 곽후본이 그를 안아서 중지시켰고 원공변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신당은 돌아서서 멀리 사주를 바라보고 하루종일 통곡하니, 사졸들은 모두 그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결국 곽후본은 500명을 그에게 주고 장사들에게 함께 갈 거냐고 물었고, 장사들은 모두 가기를 원했다. 신당은 장사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들을 이끌고 회수의 남쪽 강안에 이르렀다. 반란군이 멀리서 성을 공격하는 것이 보이자, 어떤 군리가 말했다.
"역적의 형세가 성에 들어간 것 같으니 돌아가는 것이 편하겠다."

신당은 격분하여 군리의 수염을 잡고 칼을 들어서 치려고 했다. 사졸들이 다같이 그를 구원하며 말했다.
"1천 500인의 판관이니 죽일 수는 없습니다."

신당이 말했다.
"진지에 와서 망령된 말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반드시 놓아줄 수 없다."

무리들은 요청하여도 들어주지 않자 마침내 함께 칼을 빼앗으려 하였다. 하지만 신당은 힘이 세서 무리들이 빼앗을 수 없었다. 신당이 "장사들이 배에 오르면 이 사람을 놓아주겠다"고 하자, 무리는 다투어 배에 올랐고, 그때서야 비로소 군리를 놓아줬다. 그 후 신당은 무리를 이끌고 회수의 북쪽까지 가서 반란군을 공격했고, 두도가 성 위에 군사를 늘어놓고 그와 더불어 호응하니, 반란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두도와 신당 등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포시에 이르러 돌아왔다.

또다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방훈은 장수 유길을 파견하여 정예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오형을 도와 사주를 공격하게 하고, 호주에 있던 유행급은 장수 왕홍립을 파견하여 사주 공격을 지원하게 하였다. 11월 29일 진해 절도사 두심권이 도두 적행약을 파견하여 4천 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30일 적행약이 사주에 도착하자, 반란군이 회남에서 맞아 치면서 그를 포위했다. 사주 성안에는 군사가 적어서 구원해 줄 수 없었고, 적행약과 사졸들은 다 죽었다.

한편, 회남 절도사 영호도가 이상을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였는데, 곽후본, 원공변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도량성에 주둔하여 회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봤다. 반란군은 적행약을 격파한 뒤 승리의 기세를 타 이상, 곽후본, 원공변을 공격했다. 12월 5일 이상 등이 나가서 싸우다가 대패하였고, 반란군은 도량성을 함락시킨 뒤 이상과 곽후본을 잡아서 서주로 호송하였고, 회구를 점거하니 사주의 조운과 역참의 길이 끊겼다.

강승훈이 신흥에 진을 치자, 반란군 장수요주가 유자에 주둔하고 군사를 내어 막았다. 강승훈은 중과부족이라 여기고 물러나 송주에 주둔했다. 방훈은 장수 정종실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서, 여를 노략질하고, 북쪽으로 기, 해를 침범하여 술양, 하채, 오강, 소현을 격파하고 저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자사 고석망을 죽였다. 또 화주를 노력질하니 자사 최웅이 사람을 파견하여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그들을 대접하고, 누각에 올라가서 같이 술을 마셨으며,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갑옷을 벗게 하고 아끼는 두 사람을 가리켜 자제라고 하면서 그를 온전하게 해달라고 빌며, 그 나머지는 오직 반란군이 처리하게 하였다. 이에 반란군이 화주성을 크게 약탈하고 사졸 800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사주성에서는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묽은 죽을 먹었다. 윤12월 10일에 신당이 두도에게 말하여 나아가 회, 절에서 구원병을 구하도록 하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은 뒤, 밤중에 결사대 10명을 인솔하고 장가부를 잡고 작은 배에 올라 몰래 가서 반란군의 수채(물에 세운 군사 영채)를 찍어버리고 나갔다. 다음날 아침 반란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다섯 개의 배를 가지고 그 앞을 차단하고 5천 명으로 양쪽 하안에서 추격하였다. 반란군의 배는 무거워서 가는 것이 느렸지만, 신당의 배는 가벼워서 가는 것이 빨랐다. 그 덕분에 추격을 겨우 피하고 30여 리를 가서야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윤12월 14일 양주에 도착한 신당은 영호도를 찾아가다가 15일에 윤주에 이르러 진해절도사 두심권을 만났다. 두심권은 압아 조익에게 갑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회남과 더불어 쌀 5천 곡과 소금 500곡을 운반하여 사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서주남면행영초토사 대가사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회하를 건너서 돌아다니며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니, 반란군은 회남의 수비를 다 버렸다. 대사가 먼저 회구를 탈취하고 뒤에 사주를 구해주려고 하여 도량성을 포위하였다. 반란군은 성 위에서 절하며 말했다.
"바야흐로 도두와 논의하고서 나가서 항복하겠습니다."

대가사는 이를 믿고 5리를 물러났다. 반란군은 밤중에 도망하였고, 다음날 아침에는 성이 텅 비어 있었다. 대가사는 도량성을 점거한 뒤 반란을 곧 토벌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방심했다. 그날 안개가 대단히 낀 틈을 타, 반란군 장수 왕홍립이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샛길로 빠르게 진군하다가 적진을 습격했고, 관군은 대패하여 반란군에게 죽거나 회수에 빠져 죽었다. 죽음을 면한 사람은 겨우 수백 명이었고, 잃어버린 기계, 물자와 양곡, 거마는 1만을 헤아렸다. 대가사와 감군, 장교들은 모조리 목이 베어져 팽성에 전해졌다.

대가사의 3만 군대를 궤멸시킨 뒤, 방훈은 스스로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노포를 만들어 흩어서 여러 영채와 향촌에 보이게 했다. 이에 회남의 사민들은 떨고 두려워하여 피난지인 강좌로 갔다. 영호도는 그가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방훈에게 "절월을 요청하는 주문을 올리겠다"고 설득했고, 방훈은 마침내 군사 활동을 쉬고 명령을 기다렸다. 이 덕분에 회남은 점차 흩어졌던 병졸을 모아 수비를 갖췄다.

반란군은 대가사를 섬멸한 기세를 타 수주를 포위하고 여러 도에서 공헌하는 물건과 상인들의 화물을 약탈하였다. 방훈이 더욱 교만해져 매일 연회를 베풀자, 주중이 간했다.
"옛날부터 교만하고 사치하며 일락하면 얻었다가 다시 잃게 되고, 이루었다가 다시 패배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물며 아직 얻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방훈은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러 도의 군사가 송주에 크게 모이자, 서주에서는 비로소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의 호응도 약해져서 여러 영채에서는 군사를 더 보태 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방훈은 무리를 흩어서 향촌으로 들어가게 하여 사람을 몰아서 병사로 삼게 했다. 또 현재의 군사가 수만 명에 이르렀으나 물자와 양식이 고갈되자, 부자와 상인들의 재산을 거둬들여 열에 일고여덟을 빼앗고, 재물을 감추었다는 죄에 걸려서 가족이 주멸되는 집안이 수백 호였다. 또한 방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던 교병들은 더욱 교만하고 횡포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약탈하였으나, 방훈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서주 백성들은 반란군을 적대하기에 이르렀다.

3.4. 관군의 반격

869년 정월, 서주행영도초토사 강승훈이 여러 도의 군사 7만여 명을 거느리고 유자 서쪽에 주둔하고, 신흥에서 녹당까지 30리에 성벽과 보루가 이어지게 하였다. 당시 서주의 병사가 사방을 나누어서 수자리를 서게 되어 팽성에는 수천 명도 이르지 못하게 되니, 방훈은 비로소 두려워했다. 백성들은 대부분 땅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숨었고, 방훈은 사람을 파견하여 굴을 수색해 군사로 만들었지만 하루에 20~30명을 얻는데 불과했다.

방훈의 부하 맹경문은 풍현을 지켰는데, 군사가 많은 걸 믿고 방훈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스스로 부참을 만들었다. 방훈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장차 도모하기로 했다. 마침 위박이 풍현을 공격하자 심복인 장수를 파견하여 3천을 거느려 맹경문을 도와주게 했다. 맹경문은 그들에게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겠다며 선봉에 섰으나, 막상 전투에 임했을 때 돌연 물러났고, 그를 도와주러 왔던 병사들은 다 없었졋다. 이에 방훈이 사자를 파견해 맹경문에게 자기 뜻을 전했다.
"왕홍립이 이미 회남에서 이겨서 유후가 스스로 가서 그곳을 진수하려고 하니, 제장을 모두 불러서 서주를 지킬 만한 한 사람을 선발하려고 한다."

맹경문은 기뻐하며 즉시 팽성으로 향했으나, 성에 아직 도착하기 전 몇 리 지점에서 방훈의 복병에게 잡혀 목이 달아났다. 한편 반란군이 해주를 약탈하였을 때, 해주를 지키는 병사 수천 명이 반란군이 지나갈 다리의 기둥을 잘라 떨어지지 않게 해놓고, 요해 지대에 군사를 숨겨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반란군이 지나가다가 다리가 무너지자 크게 놀라 흩어졌는데, 보병이 즉시 출격하여 이들을 거의 다 죽였다. 또한 수주를 공격한 반란군은 남도군에게 격파되어 수천 명이 참수되거나 생포되었다.

뒤이어 신당이 절서의 군대와 함께 초주에 도착하자, 칙사 장존성이 배를 가지고 그를 도왔다. 반란군은 수륙으로 군사를 늘어놓고 회수의 하류를 봉쇄하자, 절서의 군대는 그들의 강함을 꺼려서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신당이 말했다.
"내가 선봉이 되겠으니, 이기면 뒤를 이어주고, 패배하면 너희는 달아나라."

주위가 모두 만류했지만, 신당은 끝내 결사대 수십 명을 선발하여 서류로 직함을 보임한 뒤, 먼저 쌀을 실은 배 세 척과 소금을 실은 배 한 척을 바람을 타고서 물을 거슬러서 곧장 나아가게 했다. 반란군이 이들을 협공하자, 신당은 죽기로 싸우면서 물줄기를 가로막은 쇠사슬을 도끼로 모조리 자른 뒤 지나갔다. 이윽고 신당의 무리가 사주성에 이르자, 두도 등은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영접했다. 이후 정월 27일에 절서군이 흰 돛대를 달고 동쪽에서 오자, 반란군은 화선을 늘어놓고 이를 막았다.

두도는 신당으로 하여금 결사대를 인솔하여 절서군을 맞이하게 하였다. 신당은 즉시 전함에 올라서 반란군의 진지에 부딪치고 지나가다가 쌀을 실은 배 9척을 인솔하는 감군환관 장존성을 맞이했다. 장존성이 말했다.
"장사들은 길에서 앞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났다 하자 저 장존성은 누차 자살하고 싶었지만, 겨우 여기에 이를 수 있었고, 지금 또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신당이 답했다.
"역적은 많지 않으니 아주 쉽게 더불어 할 것입니다."

그들이 무리를 인솔하여 깃발을 계양하며 북을 치고 시끄럽게 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반란군은 모두 퇴각하였고, 절서군은 사주성에 입성했다. 이후 강승훈이 주야적심으로 하여금 사타족 3천 기병을 거느려 선봉에 서게 하였는데, 이들이 진지를 무너뜨리고 반란군을 물리치니 10개 진의 군사들이 귀순했다. 이후 강승훈이 천 명을 이끌고 환수를 건넜을 때, 매복해 있던 반란군이 급습했다. 이에 주야적심이 500의 기병을 인솔하여 포위망을 뚫고 강승훈을 구원하였고, 도주하는 적병을 추격하여 모조리 섬멸했다.

반란군 장수 왕홍립은 대가사의 3만 병력을 궤멸시킨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고, 자신이라면 강승훈을 능히 무찌를 수 있으리라 자부했다. 그는 방훈에게 찾아가 3만 명을 준다면 당장 강승훈을 물리치겠다고 요청했고, 방훈은 이를 허락했다. 정월 11일, 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수수를 건너 새벽에 강흥립의 진영을 포위했다. 그는 제장과 더불어 상황을 살펴보고, 공을 세우는 것이 촌각에 달렸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타족 기병대가 좌우에서 포위망으로 돌진하여 들락날락하는 것이 마치 나는 것 같아서 반란군은 혼란에 휩싸였고, 영채 안에 있던 병사들이 뒤따라 출격해 공격하니, 반란군은 오히려 대패했다. 관군이 그들을 수수로 몰아가니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을 다 기록할 수 없었으며, 녹당에서 양성까지 엎어진 시체가 50리에 널려 있었고 목을 벤 숫자는 2만여 급이었다. 왕홍립은 단기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고, 징병되었던 평민들은 모두 흩어져 산골짜기로 달아나 다시는 군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버리고 간 물자와 양곡, 기계들은 산처럼 쌓였다.

방훈과 허길은 왕홍립이 교만하고 게을러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그를 목 베려고 했다. 이에 주중이 그를 위해 방훈에게 유세했다.
"왕홍립은 두 번 승리하였고 아직 상을 주지 않았는데, 한 번 패배하자 주살한다면 공로 세운 것을 버리고 허물을 기록하는 것이니, 적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는 것이며 제장은 모두 두려워할 것이니, 그를 용서하여 그 후에 힘을 다하도록 책임지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방훈은 그의 말에 따라 왕홍립을 석방하였고, 왕홍립은 흩어진 병졸 수백 명을 모은 뒤 사주를 빼앗아 허물을 보충하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받았다. 이후 강승훈은 유자를 압박하여 방훈의 장수 요주와 한 달 동안 수십 차례 싸웠다. 3월 29일 요주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자, 관군이 이를 급히 쳐서 격파하였고, 요주가 달아나자 추격하여 유자를 포위했다. 마침 큰 바람이 불자 화공을 가하여 적진을 불태웠고, 반란군이 영채를 버리고 달아나자 사타족 기병대가 추격하여 모조리 죽였다. 유자에서 방성까지 죽은 사람이 서로 베개를 베고 있는 듯하였고, 반란군 장수 유풍이 참수되었다.

요주가 휘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숙주로 달아나자, 숙주의 수장 양비는 평소 틈이 있었던 요주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성문을 열고 들어오게 한 뒤 그를 잡아 참수했다. 방훈은 유자에서의 참패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제장을 모아 앞으로 어찌할 지를 논의했다. 주중이 눈물을 흘리며 방훈에게 말했다.
"유자는 지역적으로 중요하고 군사도 정예였으며, 요주는 용감하고 지모를 갖추었는데, 지금 하루 아침에 엎어져 죽었으니, 위험하기는 달걀을 쌓아 놓은 것 같습니다. 이제 대호를 세우고 군사를 다 모아 사방으로 나가서 힘껏 죽을 결심으로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최언증을 죽여서 사람들의 희망을 끊어버리기를 권했다. 술사 조군장도 이에 찬동했다.
서주의 산천은 두 명의 원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금 관찰사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유후(방훈)께서는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훈은 이 말에 따르기로 하고, 4월 5일 최언증과 감군 장도근, 선위사 구대부, 요좌 초로, 온정호를 죽이고, 그들의 친속, 빈객, 노복과 처첩 역시 죽였으며, 회남감군 곽후본, 도압아 이상의 손과 발을 잘라서 강승훈의 군사들에게 보였다. 또한 그는 무리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 방훈은 처음에 나라의 은혜를 입기 바라면서 신하로서의 절개를 모두 온전하게 하였는데, 오늘의 일은 앞에서 가졌던 뜻을 이미 어그러뜨렸다. 이로부터 나 방훈은 여러분 가운데 진정으로 반란할 사람과 더불어 마땅히 경내의 군사들을 쓸어버리고,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패배한 것을 돌려서 공로를 이룰 뿐이다."

이에 무리가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이어서 성 안에 있는 남자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구장에 모이도록 하고, 제장을 파견하여 나란히 있는 집을 크게 수색해 감히 한 명의 남자라도 숨겨둔 자가 있다면 그 집안을 족멸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인 이들 중 정장을 선발해 3만 명을 얻고, 다시 기치를 마들어 날카로운 무기를 공급했다. 허길 등은 방훈을 공동으로 추대하여 천책장군, 대회명왕이라 하였는데, 방훈은 왕위를 사양했다.

이보다 앞서 신당이 다시 사주로부터 날래고 용감한 사람 400명을 이끌고 양주, 윤주에서 양식을 맞이했는데, 반란군이 강둑의 양쪽에서 공격하자, 그는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나아가 100리를 가서야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광릉에 이르러 공관에서 머물렀으나 고향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배에는 소금과 쌀 2만 석과 전 1만 3천 민을 실었고, 8일에 돌아와서 두산에 도착했다.

반란군 장수 왕홍지가 무리 1만 여 명을 이끌고 우이에서 신당의 무리를 막았다. 그는 비밀리에 전함 150척을 늘어놓아 회하의 물길을 막고 화선을 풀어뒀다. 신당은 장차를 가지고 밀고 지나가면서 묘시부터 싸워서 미시에 이르렀으나 중과부적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반란군은 전함에 나무를 묶어서 옆으로 4~5척이 나오게 하여 전봉을 만들었다. 이에 신당은 용사들에게 작은 배를 타고 그 아래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여 화살과 칼이 미치지 못하게 하였고, 창에다가 화우를 매달아 그곳에 불을 붙여 전함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바란군은 모두 무너져 달아갔고, 관군은 마침내 지나가 사주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편, 방훈은 부친 방거직을 대사마로 삼고, 허길 등과 더불어 서주에서 유수하게 했다. 이때 어떤 이가 말했다.
"장군께서 바야흐로 군사적인 위엄을 빛내시는데, 부자의 친함으로 상하의 절도를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방훈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겨 방거직으로 하여금 뜰에서 종종걸음으로 가서 절하게 하였고, 의자에 기대어 부친의 절을 받았다. 이때 위박은 풍현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방훈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9일에 군사를 이끌고 서주를 떠났다. 방훈은 밤에 풍현에 도착하여 몰래 성으로 들어갔는데, 위박군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위박은 다섯 개의 영채를 만들고 가까운 성에 수천 명을 주둔시켰는데, 방훈이 군사를 풀어 놓아 이를 포위하자, 여러 영채에서 구출하려 하였으나 방훈이 중요한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관군 2천 명을 죽이니 나머지는 모두 후퇴했다.

반란군은 영채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밤이 되자 포위를 풀었다. 관군은 그 무리를 두려워하였고, 또 방훈이 스스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영채가 밤중에 붕괴되었다. 연해절도사 조상은 등현을 포위하던 중 위박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연주를 지켰다. 반란군은 그들의 성채를 모두 헐어 버리고, 물자와 양식을 실어 나르고, 서주에 격문을 전하여 스스로를 과장하며, 관군을 국적(國賊: 나라의 도적)이라 칭하였다.

회남절도사 마거가 정에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출하러 출진하였고, 18일에 군사를 세 길로 나눠서 회수를 건너게 하여 중류로 이른 뒤 크게 떠들게 하였다. 그 소리는 수 리까지 이릐렀고, 반란군은 적병의 수가 많고 적은지를 헤아리지 못해 군사를 거두어 성의 서쪽 영채에 주둔하였다. 마거는 이를 포위하여 불을 놓아 목책을 불태우니, 반란군은 대패하였고 참수한 것이 수천 급이었으며, 왕홍립은 전사하고 오형은 물러나 서성을 지켰다. 이로써 오래도록 반란군에게 포위되었던 사주성은 7개월만에 해방되었다.

방훈은 풍현에 며칠간 머물다가 군사를 이끌어 서쪽으로 가서 강승훈을 치려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으니 누에치는 일과 보리 가꾸는 일이 바야흐로 급합니다. 군사를 쉬게 하고 먹을 것을 모으고 그런 다음에 이를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간했다.
"장군께서 군사를 내신 지 며칠 만에 7만의 무리를 꺾었으니, 서군들은 떨고 두려워하고있는데, 이러한 명성과 형세를 타면 저들은 깨져서 도망하는 것은 분명하니 시기를 잃을 수 없습니다."

방훈의 아버지 방거직은 편지를 보내어 이긴 기세를 타 진군하라고 권했고, 방훈은 이를 따르기로 했다. 20일 풍현을 출발한 그는 23일에 소에 이르러 양성, 유무, 소수의 여러 영채 군사를 합해 5~6만을 모아 29일에 여명에서 유자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회남에서 패한 뒤 반란군에 있던 자가 도망하여 강승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강승훈은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병사들을 정돈한 뒤 매복하여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29일 양성 등의 군사들이 먼저 유자에 도착했다가 관군의 급습으로 패배해 달아났다. 방훈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30리 밖에서부터 유자로 향했는데, 도착할 즈음에 여러 영채가 이미 패한 데다 관군의 기세가 강하자, 그가 이끌고 있던 병사들이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 강승훈은 제장에게 그들을 추격하라고 명령하고, 기병으로 앞에서 막게 하고 보병으로 뒤를 압박하게 했다. 반란군은 낭패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밟아 죽인 시체가 수십 리에 이릐렀고,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었다.

방훈은 갑옷과 복장을 벗어 버리고 흰 저고리를 입고 도망하여 흩어진 병졸을 수습해 3천 명을 확보한 뒤 팽성으로 돌아갔고, 장수 장실로 하여금 여러 영채의 군사를 나누어 제성역에 주둔하게 했다. 이 대패는 반란군에게 심대한 충격을 입혔고, 방훈이 처음 거병했을 때 도와주고 하비성 수비를 맡았던 토호 정일이 5월에 관군에게 항복했다.

3.5. 반란 진압

6월, 마거가 사주에서 출정하여 호주를 공격하여 초의, 종리, 정원을 탈환했다. 호주에 있던 반란군 장수 유행급이 성 밖에 영채를 설치하여 관군을 막아섰는데, 마거가 먼저 경무장한 기병을 파견하여 도전하게 하였다. 반란군은 그들의 수가 적은 걸 보고 다투어 영채를 나와서 서쪽으로 가서 경기병을 쳤다. 이에 마거는 대군 수만 명을 이끌고 다른 길로 반란군의 동남쪽을 쳐서 영채를 불질렀다. 반란군은 성안으로 피신하여 굳게 지켰고, 마거는 3면에 참호를 파서 포위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회수와 잇달아 있어서, 반란군은 서주와 연락할 수 있었다.

방훈은 호주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형을 파견하여 유행급을 도와 호주를 지키게 했다. 오형은 북진에 주둔하고 호응하였으나, 마거가 별장을 파견하여 회하를 건너 이를 치게 하였고, 오형은 크게 패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도주했다. 7월에 강승훈이 임환에서 반란군 1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양성, 유무 소수 등에 있는 영채를 공략했다. 이에 반란군 장수였던 진전유가 방훈을 배반하여 강승훈에게 귀순하였고, 반란군의 세력은 더욱 약해졌다.

기현의 토호 이곤은 반란군의 수비 장수를 죽이고 성을 들어 가지고 강승훈에게 항복하였고, 패현의 수장 이직이 이직이 팽성에 가서 일에 관하여 계산하니, 비장 주매가 팽성을 들어 가지고 연해절도사 조상에게 항복했다. 이직이 팽성에서 돌아오자, 주매가 거꾸로 쳐서 그를 도망하게 하니, 조상이 군사를 발동하여 패현을 지켰다. 방훈은 휘하 장수 손장과 허길을 파견하여 각기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진전유와 주매를 공격하게 했지만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강승훈은 이긴 기세를 타고 멀리 달려가서 제성을 공략한 뒤 숙주의 서쪽에 도착하여 성을 쌓았다. 방훈은 걱정스럽고 번민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신에게 기도하고 승려에게 밥 대접을 할 뿐이었다. 이보다 전, 그는 양비가 멋대로 요주를 죽인 것에 화가 나 그를 쫓아버리고 서주의 옛날 장수인 장현임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해 주의 일을 다스리게 했다. 그 무리인 장유와 장실 등이 성 안에 있는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관군에게 항거했다. 장유 등은 영채를 성 밖에 여러 겹으로 설치하고 둘러싸인 물로 스스로 굳게 하였는데, 강승훈이 이를 포위했다.

장신은 밤에 사람을 파견해 몰래 나와서 편지를 가지고 방훈에게 보고했다.
지금 나라의 군사는 모두 성 아래에 있는데, 서방은 반드시 텅 비어 있을 것이니, 장군께서는 의당 군사를 이끌고 그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시어 송과 박 근교를 노략질하시면, 저들은 반드시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갈 것이며, 장군께서는 요해에 매복을 두었다가 그 앞에서 맞아 치면 저 장실 등은 성 안에 있는 군사를 내어서 그들의 배후를 압박할 것이니, 그들을 격파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때 조상은 주매로 하여금 풍을 치게 하여 그곳을 격파하고, 이긴 기세를 타고 서성, 하비를 공격하여 모두 탈환하고 1만에 달하는 반란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방훈은 이에 두려워하여 달아나려 하였는데, 장실의 편지를 받자 이를 따르기로 하고 방거직과 허길로 하여금 서주를 지키게 하고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 8월 27일 강승훈이 밖에 있는 영채를 불태우니 장유 등이 성 안에 들어가 나성을 지켰다. 관군은 이를 공격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으나 이길 수 없었다. 강승훈은 이를 걱정하여 변사를 성 아래까지 보내어 그들을 부르고 타일렀다.

장현임은 일찍이 변방을 지키면서 공로를 세웠기에, 비록 위협을 받아서 반란군을 따랐지만 마음으로는 일찍이 걱정하고 분해했다. 그때에 소속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자성을 지키고 있다가 밤중에 그가 가까이하는 사람 수십 명을 불러서 귀순할 것을 모의하였으며, 이어서 조금씩 퍼트리고 타이르게 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마침내 심복인 장고를 파견해 밤에 나가서 상황을 강승훈에게 알리고, 시기를 약정하여 반란군 장수를 죽이고 성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날짜가 되면 청색 정기를 세워서 호응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강승훈이 크게 기뻐하며 이를 따랐다.

9월 3일 장유가 유계정에서 술을 마시던 중, 장현임이 부장 동후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정의 서쪽에서 챙기게 하고, 장현임이 먼저 말에 뛰어 올라 앞으로 가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방훈은 이미 복야의 영채에서 효수되었는데, 이 무리들이 어떻게 오히려 남을 수 있겠는가?"

사졸들이 다투어 나아가 장유 등 수십 명을 참수했다. 성 안은 크게 소란해졌다가 장현임이 귀순하고자 하는 계책을 가지고 타이르니 저녁이 되어서 안정되었다. 다음날 성문을 열고 나아가 항복한 장현임은 강승훈 앞에서 윗옷을 벗어서 살을 드러내놓고 무릎으로 기어가며 눈물을 흘리고 사죄했다. 강승훈은 그를 위로하고 즉각 칙령을 선포하여 어사중승을 내리고 상을 후하게 내려줬다. 장현임이 다시 건의했다.
"지금 성을 들어서 귀순하였지만 사방 먼 곳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니, 청컨대 거짓으로 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하고, 무리를 이끌고 부리와 서주로 가게 해주신다면 역적의 무리들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다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강승훈이 이를 허락하자, 장현임은 5일 아침에 장작 수천 묶음을 쌓고 불을 놓아서 이를 태우니, 마치 성이 함락되어 군대가 궤멸된 상황 같았고, 직접 부리로 가니 부리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장현임은 부리에 들어가자마자 수장을 참수하고 성 안에 호령을 내려 반란군을 모조리 제압한 후, 병사들을 모아 1만 명을 확보하여 서주로 향했다. 방거직과 허길은 장현임이 배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막아섰다. 7일 장현임이 팽성에 도착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곳을 포위하고는 성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타일러 말했다.
"조정에서는 오직 역적의 무리를 주살하려는 것뿐이고, 선량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어찌하여 역적을 위하여 성을 지키는가? 만약에 오히려 호의한다면 잠깐 사라이에 어육처럼 될 것이다."

이에 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점점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던지고 내려왔다. 이후 최언증의 고리였던 노심중이 문을 열고 관군을 맞이하자, 방거직과 허길은 자성으로 피신했다. 해가 질 무렵 반란군이 북문을 통해 탈출하려 하자, 장현임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들을 쫓게 해 방거직과 허길을 참수하고, 나머지 무리는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으며, 계주에서 수 자리를 서던 사람들의 친족들을 모두 붙잡아 이들을 참수하니, 죽은 사람이 수천에 이르렀다. 이로서 서주는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한편, 방훈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석산의 서쪽으로 나아가 지나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 그러다가 6일에 강승훈이 비로소 알고 보병과 기병 8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이들을 쳤고, 주야적심으로 하여금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했다. 방훈은 송주를 습격하여 그 남쪽에 있는 성을 함락시켰는데, 자사 정처중이 그 북쪽에 있는 성을 지켰다. 반란군은 방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 내버리고 떠나서 변수를 건너서 남쪽으로 가서 박주를 노략질하였는데, 사타족 기병대가 곧 이들을 따라잡았다.

방훈은 군사를 거느리고 환수를 따라서 동쪽으로 내려가 장자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사타족에게 압박을 받아 마시거나 먹을 틈도 없이 기에 이르러 곧 물을 건너려 하였다. 이에 이곤이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막아섰다. 반란군은 갈 곳을 알지 못하여 현의 서쪽에 이르렀으나, 관군이 즉각 공격했다. 이로 인해 1만 명이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환수에 빠져 죽었다. 항복한 병사는 1천 명에 불과했다. 방훈은 이때 전사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며칠이 지난 후에 시체를 찾았다. 방훈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천 등 여러 성채에서 모두 반란군 수장을 죽이고 항복했다.

10월, 마거의 관군이 호주성을 계속 공격했으나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안의 양식이 다해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관군은 해자를 파서 두 겹으로 포위하였다. 이에 10월 17일 밤에 오형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자 마거가 이를 추격하였고, 오형은 초의에서 주살되었다. 이후 호주성이 귀순하면서, 방훈의 난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4. 반성하지 않는 조정

방훈의 반란은 1년 2개월에 걸친 전란 끝에 진압되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서주, 사주 등 반란에 휘말린 일대는 초토화되었고, 수십만에 달하는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러나 조정은 이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당의종은 거칠게 연회를 열고 정치를 친히 처리하지 않고 재상 노암에게 모든 걸 위임했다. 노암은 사치하고 부패하여 자못 뇌물 보내는 것이 통용되었다. 이에 지덕현령 진번수가 당의종을 알현하여 간언했다.
"청컨대 변함 일가를 깨뜨려 주시면 2년 분의 군사 비용을 부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함이 누구인가?"

"노암이 가까이 하는 관리입니다."

당의종은 화가 나 진번수를 예주로 귀양보냈다. 이로부터 아무도 감히 간언하지 않았고, 당의종은 마음껏 향락을 누렸으며, 대신들은 매관매직을 마음껏 일삼았고, 환관들은 황제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다시는 소생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 황소의 난으로 사실상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