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2005~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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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계약 당시 | |
소속 기간 | <colbgcolor=#fff,#191919> 2005년 7월 5일 ~ 2012년 7월 8일 |
등번호 | 13 |
이적료 | €7.3M |
기록 | |
134경기
19득점 18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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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경기
3득점 2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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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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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경기 2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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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경기
3득점 5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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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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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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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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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산 성적 | |
205경기
27득점 25도움 |
1. 개요2. 이적3. 역대 시즌
3.1.
2005-06 시즌3.2.
2006-07 시즌3.3.
2007-08 시즌3.4.
2008-09 시즌3.5.
2009-10 시즌3.6.
2010-11 시즌3.7.
2011-12 시즌
4. 이적[clearfix]
1. 개요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이적
2004-05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박지성은 유럽의 여러 명문 클럽들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게 된다. 이 중에는 첼시[1], 리버풀, 바르셀로나, 데포르티보[2] 등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맨유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워크퍼밋 발급때문에 이적 과정에서 문제가 한 번 발생했다. 워크퍼밋이 나오려면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 이상을 출장해야 하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박지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선수 보호 차원에서 부르지 않았던 경기가 여럿 있었고, 그 결과 64%밖에 안되는 것이었다. 결국 나머지 방법인 유명 축구인 3명에게 추천서를[3] 받아야 했는데, 원 소속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이적팀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말고도 1명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 1명은 박지성과 조금도 접점이 없었던 네덜란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가 써줬다. 그 이유는 2004-05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고 감명받아서 였다고 한다. 히딩크에게서 부탁을 받은 것도 있지만, 크루이프는 평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는 성격이라, 오로지 히딩크의 부탁 하나 때문에 써준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4] 실제로 해당 경기를 보고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고. 어찌됐든 박지성은 워크 퍼밋 발급에 성공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당시 아시아 마케팅 차원에서의 유니폼 팔이로 영입했다, 라이언 긱스의 백업으로 영입했다라는 말도 많았기에 기대반 걱정반이었는데[5][6][7], 거의 풀타임으로 출전하며 케즈만이나 다른 에레디비지에 선수들에 비해 무난한 적응을 보였다. 사실 실제로 영입 당시 맨유 현지팬들의 반응은 대한민국 국내팬들의 걱정보다는 나쁘지 않았다.[8]
3. 역대 시즌
3.1. 2005-06 시즌
3.2. 2006-07 시즌
3.3. 2007-08 시즌
3.4. 2008-09 시즌
3.5. 2009-10 시즌
3.6. 2010-11 시즌
3.7. 2011-12 시즌
4. 이적
박지성이 이적을 결심한 시기는 맨유가 유로파리그에서 탈락한 후 그가 5경기 연속 결장을 하던 시점이라고 한다. 이 무렵 박지성은 그간 잦은 국가대표팀 차출에 따른 혹사로 인하여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속팀에 집중하기 위하여 대표팀에서도 만 30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강행한 이후였다. 그로 인해 그는 소속팀 맨유에만 집중하며 몸 상태를 많이 끌어올렸고 본인이 느끼기에도 분명 컨디션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판단했음에도 오히려 주전에서 밀려 경기에 출전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인 박성종씨의 말에 따르면 이 시기에 박지성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7년 동안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퍼거슨과의 개인 면담이 이때 있었고, 자기관리 철저하기로 소문난 박지성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9]2012년 7월 6일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한국 선수 영입기사가 떴다. 7월 9일 구단의 미래 계획에 대해 발표하고, 그 자리에서 남한국적 선수의 영입기자회견을 하겠다는 것이 기사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기성용, 김보경 등의 젊은 선수들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7월 7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프리시즌 투어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박지성에서 루니로 교체되며 QPR로의 이적설이 유력하게 떠올랐다. 당연히 국내 축구 커뮤니티는 대폭발. 각종 찌라시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영국 BBC에서 500만 파운드(88억)에 QPR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떴고, 이어서 스카이스포츠, ESPN에서도 박지성의 QPR 이적이 결정되었다는 보도가 내걸렸다. 이어 박지성이 예정보다 하루 일찍 런던으로 출국하며 사실상 QPR로의 이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결국 7월 9일 한국 시간 오후 11시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적이 확정되었다. 등번호는 7번을 달게 되었다. 당초 8번을 달기로 하였으나 구단주의 결정으로 달게 되었다고. 또한 공석인 주장직을 박지성에게 맡기는 것을 고려중이라고 휴즈감독이 밝혔는데, 실제로 시즌 개막 후 박지성이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면서 아시아인이 최초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장을 맡는 사례가 되었다.[10] 그리고 이 후 23-24 시즌 손흥민이 토트넘 핫스퍼의 주장을 맡기전까지 아시아인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장을 맡는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통산 기록 205경기 27골 2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134 | 93 | 41 | 19 | 18 |
챔피언스 리그 | 38 | 24 | 14 | 3 | 2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1 | 0 | 1 | 0 | 0 |
FA컵 | 14 | 12 | 2 | 2 | 0 |
EFL컵 | 11 | 11 | 0 | 3 | 5 |
유로파 리그 | 3 | 3 | 0 | 0 | 0 |
FIFA 클럽 월드컵 | 1 | 1 | 0 | 0 | 0 |
UEFA 슈퍼컵 | 1 | 0 | 1 | 0 | 0 |
FA 커뮤니티 실드 | 2 | 2 | 0 | 0 | 0 |
합계 | 205 | 146 | 59 | 27 | 25 |
[1]
히딩크 감독은 PSV와 커넥션이 있었던 첼시로 가길 원했다고 한다.
[2]
지금이야 스페인 2부, 3부리그에 있는 팀이지만 당시만 해도 적은 자본으로도 라리가 우승 경쟁을 벌이고 끝내 우승도 차지해 본 강호였다. 챔스에서도 2003-04 시즌 AC밀란을 상대로 리아소르의 기적을 일궈냈으며 스페인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을 다수 보유한 막강한 팀이었다.
[3]
즉, 보증인 3명이 필요한 것
[4]
반대로 실력이 없었다면 누구에게 부탁을 받아도 써주지 않았을 것이다. 추천서라는 것은 말그대로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바탕으로 한 사람 실력을 보증 서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선수가 못한다면 그 책임과 비난이 어느정도 자기에게 돌아온다. 참고로 크루이프는 저 경기를 보고 박지성에 대해 축구를 어떻게 하는지 아는 선수라고 칭찬한 바 있다.
[5]
프리미어리그 1R에 선발 출장했을 때 국내에서도 이슈가 될 정도였다.
[6]
이런 말이 안되는 소리가 나오던 건 당시 한국에서 해외축구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던 것도 크다. 당시 박지성은 유럽 빅리그의 클럽이 주목하던 선수였으며 480만 파운드의 바이아웃이 걸려있었기에 박지성을 영입하려던 모든 클럽이 주급으로 경쟁했었고, 그 중에서 맨유가 무려 45,000 파운드를 제의했던 것, 이게 지금 같은 돈잔치의 시대에서 보면 낮은 금액으로 보일수 있지만 당시는 앙리, 반 니스텔루이 같은 리그 최고 주급자가 55,000 파운드, 60,000 파운드를 받던 시절이다. 심지어 맨유는 박지성을 영입하면서 PSV에 바이아웃에 추가금을 얹은 60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
[7]
다만 맨유에서 물론 훌륭한 활약을 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원래 팀이나 팬들이 기대하던 방향과는 다른 형태로 적응 및 팀에 공헌했던 것이라 팀이나 팬들이나 모두 아쉬워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맨유 시절의 박지성이 과대평가됐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8]
여담으로 당시 국내에는 FC코리아를 비롯 축구 지식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흔히 말하는 축알못 언론과 네티즌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긱스의 백업이라는 루머는 그나마 양반인 편이고, 로이 킨의 백업일 거라는 말도 있었다. 박지성이 하드워커 타입이라는 이유로 직전 시즌 UEFA 베스트 공격수 후보에 오른 윙포워드를 박투박 미드필더로 쓰려고 영입한다는 주장까지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거기다 등번호가 13번으로 배정되자, 정작 본토 선수들은 신경도 안쓰고 실제로 레전드 선수들도 많이들 달고 뛰던 등번호[11]임에도 '서구권에서 기피하는 숫자라 선수들도 다들 기피하는 등번호다' 라는 헛소리를 하며 이상한 우려를 하기도 했다. 물론 박지성이 당시 맨유라는 거물급 팀으로 이적해 7년동안 뛰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음에도 여전히 국내 축구선수가 유럽으로 이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부정적인 반응이 먼저 나오는 건 아직까지 바뀌지 않았다. 한국 축구계의 안타까운 부분.
[9]
부친이 혼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박지성이 와서 한잔 해도 되냐고 물었고, "경기를 뛰어야 하는데 괜찮겠냐?" 라고 부친이 걱정하니 박지성 왈 "어차피 나가질 못하는 걸요."라고 했다고. 평소 그의 자기관리 능력이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0]
지난 시즌까지 QPR에서 7번을 달았던
아델 타랍은 등번호를 박지성에게 주고 10번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전임 주장인
조이 바튼의 경우,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인 맨시티전에서
카를로스 테베스와
세르히오 아구에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대형사고를 치고 12경기 출장 정지의 중징계를 먹은 뒤, 거의 반 강제적으로 퇴출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11]
당시에만 해도 네스타나 발락같은 특급 선수들도 쓰고 있던 등번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