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선규(朴宣奎) |
생몰 | 1899년 12월 2일 ~ 1957년 11월 28일 |
출생지 |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 |
사망지 | 전라남도 무안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선규는 1899년 12월 2일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김순기(金順淇)· 정순홍 등 10여명의 마을 유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경고문(警告文)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 이윽고 3월 20일 새벽, 그는 <친일파의 반성, 자숙과 민중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경고문을 무안읍내의 요소요소에 부착하고, 동시에 수십명의 군중을 이끌고 인근 남산에 올라가 독립을 경축하는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오후 1시경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경찰의 방해를 받았지만, 그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개의치 않고 조국독립 경축의 의의(意義)를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했다.오후 2시경 시위 군중이 5백명으로 늘어나자,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투입시키고 목포에서 무안군수와 목포경찰서장이 급히 이곳으로 달려와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또 한편으로는 명망높은 기관장들을 내세워 시위중지를 요청하였으나, 그는 군중과 함께 밤 10시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귀가했다. 이후 일제는 대적인 검거를 시작해 57명을 체포했는데, 그 중에는 그도 있었다. 이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ㅇ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엔 무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11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선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