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석홍
성명 | 박석홍(朴錫洪) |
이명 | 방일정(方一正)·박방일(朴方一)·박석한(朴錫漢) |
본관 | 밀양 박씨[1] # |
생몰 | 1896년 12월 26일 ~ 1985년 2월 22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
사망지 | 경상북도 의성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석홍은 1896년 12월 26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중국의 흑룡강성 아성현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을 발간하면서 목단강 일대의 만주 한인 동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후 1924년 흑룡강성 산시에서 신민부 기관지 <신민보>의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어 배일사상 확산을 위한 선전활동에 진력했으며, 1925년 아성에서 김훈(金勳) 등과 함께 잡지 <혈청년>을 발간해 혁명적 국권회복 방략의 당위성과 투쟁방법을 선전했다. 그리고 1927년 이백파(李白波)와 함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중앙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집단살해 계획을 추진했다.
1927년 1월, 박석홍은 중국 중동선 해림에서 단두단(斷頭團)의 명의로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 거주하는 이동빈(李東彬)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 5천 원의 기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워 놓고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사전에 탐지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아나키즘을 추종하는 단체를 설치해 독립운동을 지속하려 했지만 동지들이 흩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했고, 이후로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고 20여 회의 예비 검속까지 당했다고 한다. 8.15 해방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85년 2월 2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석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선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석홍
성명 | 박석홍(朴錫洪) |
생몰 | 1891년 11월 11일 ~ 1956년 9월 17일 |
출생지 | 평안북도 선천군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석홍은 1891년 11월 11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상하이로 망명했고, 1919년 5월 제4회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원 의원 조완구의 발휘로 임시사료편찬회가 구성되고 총재에 안창호, 주임에 이광수가 취임할 때 자신은 조역(助役)으로 임명되어 임사사료편찬회의 일원이 되어 근무했다. 그는 편찬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1919년 8월 25일에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의 서기로 임명되어 1920년 10월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하며, 단지 해방 후 서울에 살다가 1956년 9월 17일에 사망했다는 것만 확인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석홍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사문진사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