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계석(朴啓石) |
이명 | 박개석(朴開碩), 박완민(朴完民) |
생몰 | 1883년 3월 3일 ~ 1908년 11월 16일 |
출생지 |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
사망지 | 강화도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계석은 1883년 3월 3일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강화진위대에 입대해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8년간 근무했고, 이후 김용기(金龍基) 의병장의 부관 지홍윤(池洪允) 휘하 중대장으로서 의병 활동을 벌였다. 그는 강화도 말도(唜島)를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김덕순, 고부성(高夫成), 지홍일(池洪一) 등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1908년 8월까지 교동, 개성, 풍덕, 배천, 연안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강화도 석포에서 일본군의 밀정인 양학진(梁學辰)과 송대현(宋大鉉)을 처형했다.그러나 1908년 8월 일제가 4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의 의병 진압에 착수하자, 박계석은 의병대를 일시 해산시킨 뒤 무기를 숨긴 채 은신했다. 그해 11월 12일, 그는 강화군 삼해면 하도동 주막에서 인천경찰서 순사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품속에 지녔던 권총으로 순사를 부상시켰다. 이후 그는 강화주재소에서 고부성(高夫成)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박계석은 자신이 강화군 내가면에서 일본인 10여 명이 고분을 도굴하는 것을 공격해 3명을 총살하고 3명을 매장했으며,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엽총 3정을 탈취한 뒤 의병 90명과 간점면에서 일본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고, 다시 70명의 의병을 이끌고 말도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 연안군 증산포로 가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실 등을 진술했다. 이후 11월 16일 강화주재소에서 인천경찰서로 이송되던 중 형구를 파손하고 저항을 시도하다가 사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계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