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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바르그 비케르네스 Varg Viker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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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 |
크리스티안 비케르네스 Kristian Vikernes[1] |
본명 |
루이 카셰 Louis Cachet[2] |
출생 | 1973년 2월 11일 ([age(1973-02-11)]세) |
노르웨이 베르겐 | |
국적 |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마리 카셰 (1997년 결혼)[3] |
자녀 | 8명 |
장르 | 앳모스피릭 블랙, 앰비언트 뮤직 |
종교 | 신이교주의 ( 북유럽 신화)[4] |
사상 | 네오나치즘, 반기독교주의 |
링크 | 공식 사이트 |
[clearfix]
1. 개요
노르웨이의 뮤지션이자 매드 아티스트.전설적인 블랙 메탈 원맨 밴드 버줌의 창시자이다. 버줌은 1991년에 활동을 시작했고 2018년에 활동을 종료했다.
음악적으로는 좋은 평들이 많지만 그의 정치 성향이나 종교적 취향으로 인해 여러 번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교회 방화 및 살인죄로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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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유로니무스 살인사건과 교회 방화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바르그 비케르네스(당시에는 '카운트 그리쉬나크'라는 이름으로 활동)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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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고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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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감옥에서 인터뷰하는 바르그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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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모습 |
본명은 상술했듯 크리스티안 비케르네스(Kristian Vikernes)로 노르웨이 베르겐(Bergen)에서 1973년 2월 11일 21시 58분에 출생했다.
6살이 된 바르그는 부모님을 따라서 이라크로 이주했고 당시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전기기사로 일하고 있었던 바르그의 아버지는 바르그와 그의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바르그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그를 이라크 현지 학교에 입학시켰다. 바르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과 갈등이 발생하자 그 선생을 "원숭이"라고 불렀지만 백인이었기 때문에 체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의 경험이 바르그가 백인 우월주의 사상에 빠지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1985년, 부모가 이혼하고 노르웨이의 베르겐으로 돌아온 바르그는 재혼한 어머니와 살면서 노르웨이의 학교에 입학했지만 급우들을 아무 이유없이 괴롭혀서 학교에서 양아치로 찍히고, 1987년부터 접한 네오나치 사상과 일렉트릭 기타에 푹 빠지게 되자 학교는 자신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1989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학교에서 자퇴했다. 이후 바르그는 집에 틀어박혀서 나치즘에 관련된 책들이나 반지의 제왕을 읽거나 기타 연습을 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임모탈과 버줌이라는 두 밴드의 전신이 된 노르웨이 베르겐 출신의 밴드, Old Funeral의 라이브 영상. 가운데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청년이 바르그이다.
1990년, 바르그는 학창시절 사귀었던 친구의 소개로 Old Funeral이라는 데스 메탈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하여 뮤지션으로서 데뷔했다. 같은 해, 바르그는 Old Funeral의 앨범 발매 건으로 오슬로로 건너가서 메이헴의 리더이자 자신보다 5살 연상인 기타리스트 유로니무스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톨키니스트에다 메탈 기타리스트라는 점에서 공감대를 얻으며 친해지게 되었고 바르그는 유로니무스의 사상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유로니무스 또한 어린 바르그를 마음에 들어했으며 특히, 바르그의 기타 연주 실력을 높게 샀다고 한다. 바르그가 오슬로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와 Old Funeral 멤버들과의 사이는 멀어졌고 결국 1991년, 드럼과 보컬 포지션을 맡고 있던 리더 Padden과의 싸움 끝에 바르그는 밴드에서 해고당했다. Old Funeral에서 방출된 직후, 바르그는 Immortal의 멤버로 유명한 Abbath와 함께 Satanel이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나 몇 번의 리허설을 가진 후 활동 방향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차이로 밴드는 별다른 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해체했다.[5]
이후 바르그는 당시 유로니무스가 막 개장한 블랙 메탈 전문 레코드점 Helvete에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자신의 닉네임을 카운트 그리쉬니크[6]로 정하고 유로니무스가 이끄는 사타닉 서클에 가입하여 각종 테러 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사타닉 서클에는 일종의 계급제도가 있어서 범죄 행위를 많이 저지를수록 계급이 올라갔는데 서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던 바르그는 곧, 유로니무스에 이은 2인자가 되었으며 네오나치였던 바르그는 블랙 메탈 씬에 나치즘을 도입시킨다.[7] 유로니무스는 바르그의 영향을 받아 네오나치가 되었고 바르그를 아예 자신의 오른팔로 키울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 유로니무스의 후원으로 1992년, 바르그의 원맨 밴드 버줌의 앨범들이 녹음되었다. (버줌 1집에 수록된 <War>의 후반부 기타 솔로는 유로니무스의 연주이다.)
사타닉 서클은 1992년 6월 6일, 홀멘콜렌 교회와 판토프트 목조교회에 불을 지르고 잿더미로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방화를 시작했으며 바르그는 1992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진행된 메이헴의 데뷔 앨범인 De Mysteriis Dom Sathanas의 레코딩에 베이시스트로 참여하였다.[8] 사타닉 서클은 1992년 한해에만 무려 8건의 교회 방화를 저질렀고 이러한 방화 사건의 중심에는 유로니무스와 바르그가 있었다.
1993년 1월 말, 바르그는 블랙 메탈과 앞으로 발매될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홍보하러 Bergens Tidende지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인터뷰 도중, "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회 방화 사건의 용의자 중 한명이며 1993년 4월에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사타닉 서클이 앨범 표지처럼 노르웨이의 국보인 니다로스 대성당(Nidaros Cathedral)을 폭파시킬 것"이라 경고했고 이 내용을 들은 기자가 깜짝 놀라서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경찰에 바르그를 신고하였다. 결국 바르그는 경찰에 잡혀서 구치소에 수감되게 된다. 바르그가 잡히자 유로니무스는 편지나 전화 등을 통해 "경찰에게 바르그에 대한 정보나 교회 방화 등에 대해 진술을 한다면 사타닉 서클로부터 피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동료 뮤지션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바르그가 방화했었던 판토프트 목조교회(Fantoft Stavkirke). 12세기 노르웨이 건축물로 세계대전의 화염구덩이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교회였지만 바르그가 불을 질렀다. 다행히도 1997년에 복원되어서 사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93년 3월 증거불충분으로 바르그가 석방되자 유로니무스는 바르그의 원 맨 밴드 버줌의 새 EP인 Aske를 발매하면서 바르그가 전에 방화한 판토프트 목조 교회[9]12세기에 건축된 교회로 12세기 교회 자체로서 의미도 있었던 건물이지만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건축물로도 의미가 있으며 목조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노르웨이 건축물이었다.(다른 목조교회들은 세계대전 중 많은 수가 전소, 파괴되었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반불교 세력들이 부석사 무량수전에 불을 지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 뒤 해당 교회는 1997년에 복원되었다.]가 불에 탄 사진을 앨범 자켓으로 썼다. 게다가 이 앨범을 발매하면서 CD와 함께 케이스에 라이터를 동봉했다. 그 라이터로 교회 불태우라고.
그러나 바르그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유로니무스는 단지 입으로만 블랙 메탈의 정신을 떠들 뿐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전혀 없는 사이비"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구치소에서 나온 후 유로니무스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잠적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 자신이 새로운 리더가 되어 노르웨이 블랙 메탈 씬을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바르그는 자신의 본명을 Kristian에서 Varg "Qisling" Larssøn Vikernes[10]로 개명한 뒤, 새로운 레이블 Cymophane Productions을 창설하고 "나는 범죄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기는 두려워하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이념을 주입시키기만 했던 겁쟁이 유로니무스와는 다르다. 나는 감옥까지 다녀온 행동파다."라고 자신을 홍보하면서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밴드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바르그의 행동을 전해 들은 유로니무스는 주변 동료들에게 "바르그를 납치해서 전기 고문하여 죽여버리고 바르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서 퍼트릴 것"이라는 등 바르그에 대한 분노를 표했고 노르웨이 내에서 바르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자 Helvete를 다른 장소에 재개장하고 바르그 대신 Emperor의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했으며 스웨덴의 블랙 메탈 밴드 Dissection이나 일본의 블랙 메탈 밴드 Sigh 등 노르웨이 밖에서 활동 중인 블랙 메탈 뮤지션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여 바르그에게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11] 그러자 바르그는 자신과 같이 메이헴의 데뷔 앨범 작곡에 참여했던 Blackthorn라는 기타리스트에게 부탁하여 유로니무스가 살고있는 Tøyen가(街)에 위치한 공동주택을 알아낸 후 1993년 8월 10일 새벽 3시에 그곳으로 쳐들어가서 유로니무스를 불러낸 뒤 무참히 살해했다.[12]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유로니무스의 시체에는 칼로 찌른 자국이 23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바르그의 증언에 따르면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유로니무스를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고도 한다.
유로니무스를 살해한 바르그는 도망쳤으나 일주일 후 노르웨이 경찰에게 붙잡혔고 살인, 방화, 강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르웨이 사법부는 범행의 잔혹성을 고려하여 징역 21년을 선고했는데 21년은 노르웨이 법정 유기징역 최고형량이며 훗날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범인 브레이빅 또한 징역 2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바르그가 잡혔을 당시에는 무기징역이 있었기 때문에 예방적 구금 처분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해서 잘못된 사상에 빠진데다가 각종 범죄 행위를 실천할 만큼 호전적인 인성을 지닌 바르그는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살인자로 전락하여 사회에서 영구 추방당하게 되었다.
극우주의자이기 때문에 유로니무스를 살해한 것 외에도 노르웨이의 아나키즘 단체인 'Blitz'의 본부에다 폭탄 테러를 시도하려던 적도 있었다.[13] 탈옥을 하려고 그의 어머니가 극우단체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소일을 하루 남겨두고 탈옥을 하다가 결국 잡히기도 했다.
3. 출소 이후
2009년 가석방된 바르그는 2010년 새 앨범인 belus를 발매했는데, 나치즘을 버렸다고 주장했다.[14] 바르그는 블랙 메탈씬에서 Graveland와 함께 유명한 극우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다. 새 앨범의 컨셉은 북유럽의 주신 오딘의 부활.북유럽, 정확히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종교와 신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수감 생활 동안 모은 자료를 토대로 2011년 Sorcery And Religion In Ancient Scandinavia(고대 스칸디나비아의 마법과 종교)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책을 보면 여전히 기독교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유럽 세계가 마음에 안 드는 듯.
2012년에 발매되는 Umskiptar 앨범은 모든 가사를 에다(북유럽 신화)의 일부인 Völuspá(무녀의 예언)에서 따 왔으며, 새로운 빙하기에 의해 대격변을 맞이하는 유럽의 모습이 앨범의 컨셉이라고 한다.
출소 후 음악의 분위기가 다소 바뀌었다. 블랙 메탈보다 앰비언트에 더 가까운 느낌. 버줌의 팬들 중에서는 '기타가 자글거리지 않아서 버줌같지 않다'라든지, '감옥에 다녀오더니 음악이 변했다'라든지 수감 생활 이후 발매된 앨범에 대해 혹평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르그도 이런 평이 짜증났는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나는 단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 옛날 음악을 답습하고 재생산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던 적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며 쿨하게 씹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블랙 메탈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돈이 아쉬워서 음악을 하는 양반은 아니다. 물론 이쪽을 더 선호하는 쪽도 많다.
2012년 인터뷰에서 그의 아내는 Marie Cachet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조각가이며 프랑스야 말로 사상과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며 극찬하면서 자신도 그녀와 같이 프랑스로 이민가고 싶으나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해외로 나갈 수 없으며[15]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운둔 중이라고 자신의 근황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 먹칠을 하지 않게 명예로운 방법으로 자결하여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게다가 요즘은 음악 작업보다 자신이 만든 세계관으로 TRPG를 만드는데 빠져있다고 한다. 결국 2015년 8월 MYFAROG라는 TRPG를 출시했다. 근데 바르그 답게 내용이 상당히 병맛이다. 묘하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심히 연상시키는 적들이 나온다.
2013년 3월, 아내와 함께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유적을 탐사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편집 작업은 프랑스에 위치한 아내의 작업실에서 행해졌으며 다큐멘터리의 음악은 버줌이 담당했다.
2013년 7월 16일에는 프랑스에서 아내가 총기 4정을 산 이후 테러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버렸다. 실제로 테러를 한 건 아니고 바르그의 과거 행적 등을 보아서 총기 구매 직후 잡힌 것이라고 한다.[16] # 그리고 풀려났다. 이 때 바르그가 출소 후 Louis Cachet 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프랑스에서 아내와 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신이교주의, 생존주의, 인종주의 등 자기 사상과 일상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고 2018년 6월에는 버줌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였다.
2018년 8월에 올린 영상에 의하면 의외로 2차대전 당시의 일본의 위안부 문제 등, 일제의 아시아인에 대한 학살행위와 현대의 이상성도착증 성향이 포함된 일본 애니메이션-망가 등을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반기독교주의- 신이교주의[17]에 대한 이상적 롤모델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재까지도 2차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 및 나치즘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있다.
2019년 5월 경 남유럽인[18]들을 갈색(brown) 종족의 피가 섞인 인종이지 백인이 아니라는 인종차별성 발언을 했다가 헤이트 스피치와 인종차별을 이유로 결국 유튜브 측에서 공식적인 유튜브 채널 강제 폐쇄를 당했다. 여전히 극우주의성향과 인종차별주의,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극단적인 정치적, 사회적 성향 내지는 사상을 버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는 예상과는 다르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마스크 착용에 대해서도 오히려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미착용자에 대한 비난의 트윗을 남겼다.
2022년에 바르그는 자신이 직접 기획, 개발한 TRPG MYFAROG과 관련된 업무를 위주로 활동하였다. 또한, Bandcamp에서 서비스 하던 버줌 음원을 목록에서 내리기 이전 트위터에서 "앞으로는 Youtube로 버줌을 들으면 됩니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바르그는 기본적으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미국과 자유주의가 최악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에 더 호감이 있어 보인다.
2024년 현재는 각종 서적을 집필하고 있으며 자서전과 자신의 첫 장편 판타지 소설을 발표했다.
4. 총평
음악가들 중 재능과 인격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이다.[19] 노르웨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사적 제재를 그닥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까지 피살자인 유로니무스의 유가족들에게 딱히 보복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은 듯.바르그에게 살해당한 유로니무스도 동고동락하던 메이햄 밴드 보컬 데드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을 때 그의 시신을 촬영하여 자신이 운영하던 레코드 점에 전시한 정신나간 행동을 하던 작자여서 메이햄 멤버들조차 절연했었고[20] 유로니무스의 유가족들은 유로니무스 생전에도 유로니무스가 하던 인간말종 짓거리의 뒷수습을 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바르그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인 죗값을 다 받은 상태이기에 보복을 당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대신 사회적으로는 살인마로 낙인찍혀 반쯤 매장당했다.
4chan에서는 트인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며 한때 컬트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21] 시간이 흘러 현재는 그냥 음악만 잘 만드는 인간 말종 취급을 받는다.
다만 이토록 인간성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많음에도 바르그의 음악만큼은 누구도 그 창의성과 예술적 깊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바르그가 겨우 10대 시절에 블랙 메탈 씬을 홀로 개척하다시피 했던 것[22]도 사실인 걸 보면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바르그 본인은 자신의 음악들이 블랙 메탈이라고 불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왜냐하면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명을 주창하고 널리 퍼트린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이 죽인 유로니무스였기 때문이다.
5. 기타
- 밴드 이름이나 개명한 이름 등에서 봐서 알 수 있듯이 어린시절부터 상당한 톨키니스트였으며 지금도 엄청난 빠다. 정작 J. R. R. 톨킨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다가 인종차별을 혐오했다는게 아이러니... 바르그는 이에 톨킨은 정신은 이교인데 어쩔수 없이 기독교인 된거 아니냐든가[23] 요즘 가톨릭이야 80퍼센트는 이교도 아니냐면서 정신승리하다가 톨키니스트들한테 비웃음을 받은 바 있다. 당연히 톨키니스트들은 바르그를 파시스트 돼지이자 공공의 적으로 취급한다.
- 당연하게도 단 한 번도 라이브 공연을 한 적이 없다. 원맨 밴드도 더러 게스트 멤버를 초청하여 공연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앨범 대부분이 바르그가 교도소에 입소한 뒤 발매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할만 한 사정이다. 다만 공연을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Ulver의 드러머였던 AiwarikiaR가 버줌의 드러머로 가입하려고 했었고, Darkthrone의 Fenriz와 Mayhem의 Hellhammer도 버줌의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 버줌의 작품들이 북유럽 신화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고, 그가 신이교주의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가져 신학 연구와 관련 집필을 해왔음에도 신이교주의자들 사이의 평판은 극과 극을 달린다. 또한 버줌이 오딘을 위해 불태웠다고 하는 기독교 교회들 중 일부는 고대에 북유럽의 신들을 섬기기 위해 지어진 신전이었음이 밝혀져,[24] 신이교주의자 입장에서도 신성모독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버줌이 했다는 고대 북유럽 신학 연구조차도 학계 학설과 상충되는 등 오류가 많고, 상상으로 땜빵되었으며, 인종주의와 나치즘에 오염되어 학문적 가치가 낮다고 부정되고 있다. (바르그는 북유럽인이 네안데르탈인에서 독보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후손으로, 현생 인류와 다르다고 믿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바르그는 진심으로 이교 신을 섬긴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 노르웨이에 잠시 거주하며 사타닉 서클 멤버들과 함께 어울렸던 한 영국인 여성이 훗날 회고한 바에 의하면 바르그는 항상 유로니무스와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한 눈에 그들이 매우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기분 나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 비르그는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종종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게되면 가만히 서서 그 사람을 몇 십분이나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보곤 했으며 어느 날은 바르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와서 "검게 염색한 너의 머리를 다시 금발로 되돌리는게 좋을 거야."라며 조용한 목소리로 협박하고 사라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
- 4chan 등지에서는 바르그가 "야동 그만봐라"(Stop watching porn)하는 짤방이 밈으로 퍼졌고 금딸의 상징으로 통하고 있다. 한국의 일부 음악 커뮤니티 내에서는 상기한 유튜버 활동 때문에 병신TV 취급을 받거나, 어설픈 주먹질과 발차기를 하는 움짤로 인해 희화화 되곤 한다.[25]
- 블랙 메탈 + 네오나치 + 방화범 + 살인자라는 극강의 조합 덕에 한국의 록 음악 관련 커뮤니티, 특히나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에서 절찬리에 밈으로 사용중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름인 바르그 혹은 비케르네스로 불리지는 않고 그의 1인 밴드였던 버줌으로 불린다.
[1]
자신의 이름이 너무 순둥이처럼 들린다며 지금의 바르그 비케르네스로 개명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서양인들 중에는 기독교식 이름을 버리고 이렇게 바꾸는 경우가 많다.
[2]
프랑스인인 부인의 성을 따온 것이므로 카셰가 원래 발음에 가깝다.
출처
[3]
옥중결혼했다.
[4]
트위터에 보면 특히
오딘을 존경하는 듯.
[5]
Abbath는 바르그 비케르네스에 대해서 상당히 반감을 갖고 있는지 2000년대 초반 D-D-D-DANNY가 진행하는 리얼리티체크라는 프로그램에서 백스테이지 인터뷰를 가졌을 때 "교회에 불 지르면 뭐하냐? 어차피 불탄 교회를 정부에서 다시 건립할 뿐인데. 그 돈, 결국 우리한테서 다 걷어가는 것 아니냐?"라고 시큰둥하게 말하거나 아예 바르그를 직접적으로 겨냥해서 "우리 밴드는 음악으로만 사람을 다치게 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을 평생 감옥에 가둬놔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6]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 이름. 그는 책에 나오는 수많은 종족들 중에서 오크를 가장 좋아했다.
[7]
1987년부터
스킨헤드 패션과
네오나치 활동을 시작한 카운트는 블랙 메탈씬에 나치즘을 제대로 도입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92년 발행된 네오 나치 단체 블러드 앤 호너(Blood & Honour)의 정규 잡지에서는 바르그가 존 88(Zorn's 88) 소속의 네오 나치이며 화이트 아리안 레지스탕스(White Aryan Resistance)애도 소속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8]
이후 유로니무스는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헝가리의 메탈 밴드 Tormentor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던 아틸라를 노르웨이로 초빙하여 곡들의 보컬 멜로디를 최종적으로 완성했고
1993년
4월 26일에 아틸라를 다시 초빙하여 앨범의 보컬을 녹음했다.
[9]
해당 교회는 무려
[10]
참고로
Varg(바르그)는 노르드어로 늑대(Wolf), 그 중에서도 특히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펜리르나
스콜,
하티와 같은 마수에 가까운 괴물 늑대를 말하며(일반적인 늑대는 ulfr라고 한다) Qisling은
비드쿤 크비슬링의 이름을 본 딴 것이다. 참고로 바드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판
이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매국노.
[11]
당시 바르그는 블랙 메탈 씬이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아리아인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나라에서 블랙 메탈 장르로 활동하는 밴드들을 혐오하고 배척했다.
[12]
Blackthorn에 의하면 새벽 3시, 자신이 먼저 유로니무스의 집 앞에서 벨을 눌렀고 잠을 자다 깬 유로니무스는 짜증이 나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나 바르그가 레코드 계약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며 다시 유로니무스를 불러내자 사업 문제로 자신을 찾아온 바르그를 보고 놀란 유로니무스가 순간 방심해서 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13]
'Dagbladet' 2007년 7월 9일자
[14]
어디까지나 나치즘 사상만 버렸을 뿐 기본적인 정치 성향은 여전히 극우쪽에 가깝다.
[15]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나라도 엄연한 살인범의 입국을 허가할 일은 없다.
[16]
아직 유럽 전역에서 노르웨이 연쇄 테러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가해자가 자신의 사상이 담긴 성명서를 바르그 비케르네스가 복역하고 있는 감옥으로 보낸 사실도 있다고 한다. 용의자인 브레이빅이 평소 버줌의 팬이었다고. 정작 바르그 본인은 브레이빅을 멍청한 놈이라고 깠다.
[17]
일본
국가신토가 정립될 때 신토는 종교가 아닌 일본의 문화라는 신토비종교론에 현재도 일부가 혹하는 것을 지칭하는 듯하다. 극우 반기독교 신이교주의자인 그의 시각에서 보면 일본 정부가 국가신토를 종교로서, 더 나아가 국교로서 국민들에게 적극 장려해야 되는데 국가신토가 일제의 전쟁 범죄의 도구로서 사용된 바 있다 보니 일본 정계에서 이를 씻기 위해 신토비종교론을 주장하며 국가신토와 선 긋기를 하자 이에 실망한 듯 하다.
[18]
아랍, 마그레브, 유대인 계통
[19]
음악적 재능과 별개로 인간성이 별로인 인물들은
로저 워터스나
에릭 클랩튼 등 다수 존재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살인까지 가거나 최소 살해 협박이라도 한 사람은 없다시피하다.
[20]
오죽하면 메이햄의 베이스 담당인 네크로버처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바르그보다 먼저 유로니무스를 죽일 생각이었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조금도 슬프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
[21]
정작 진심으로 찬양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22]
바르그의 원맨 밴드
버줌은 블랙 메탈 밴드들 중 음악성으로는 탑으로 인정받으며 바르그가 직간접적으로 음악적 방향성에 영향을 준 밴드들인
메이헴,
다크쓰론은 블랙 메탈 씬 내에서 전설적인 뮤지션들이다. 또한,
DSBM, 즉 자살 블랙 메탈의 방법론은 하나같이 버줌 4집
Filosofem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도 모자라 최근 블랙 메탈이 사악함이 아닌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버줌이 시도한 다크 앰비언트의 영향력 하에 있으니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사람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23]
참고로 영국은 성공회 국가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왕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할 정도로 가톨릭 신자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존재했고, 톨킨이 살던 시대에는 아예 대놓고 차별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장기간 받아온 박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가톨릭이 주류인 국가의 신자들보다 더 독실한 소수정예로 이름높았다. 톨킨은 더할나위 없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오죽하면 성공회 신자인 아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여 부부 사이가 틀어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24]
사실 유럽에는 이러한 사례들이 많다. 그 유명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활용되던 적이 있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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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니무스를 어떻게 죽였는지 시연하는 바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