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06:44:59

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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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eçin_Kalesi_09.jpg
시가지 남쪽 외곽의 베친 성채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전경
파일:Mylasa Roman Gumuskesen Tomb 2.jpg 파일:Firuzbey_Camii 01.jpg
서기 2세기 무렵 마우솔로스 영묘를 본떠 만든 영묘 1394년 멘테셰 총독이 세운 호자 피루즈 베이 자미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
2.2.1. 멘테셰 후국
2.3. 근현대

1. 개요

튀르키예 서남부의 도시. 아이든에서 남쪽으로 50km, 무을라에서 서쪽으로 45km, 보드룸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6만에 불과한 소도시지만, 고대 카리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자 중세 멘테셰 후국의 수도로써 도시 내외에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2. 역사

파일:Milas_Baltalı_Kapı_4949.jpg
로마 시대 성벽과 성문 (발라트 카프) 및 그 앞의 석상
파일:Becin_5237.jpg
아크로폴리스 역할을 한 베친 성채

옛 지명은 밀라스였고, 인근 라브란다 성지에 있는 제우스 석상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신성시하였다. 해당 석상은 기원전 7세기 초엽 밀라사 출신의 카리아 군주 아르셀리스가 리디아에서 가져온 양면 도끼를 들고 있었다. 아르셀리스는 리디아 왕 기게스가 내전 승리 및 계승에 기여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밀라스에는 라브란드 제우스 (제우스 스타라티오스) 외에도 제우스 카리우스 (카리아의 제우스), 제우스 오소고아 등의 토착화된 제우스가 숭배되었다. 이들은 밀라사 3대 신으로 불렸다. 제우스 카리우스는 카리아 지방 뿐만 아니라 리디아, 미시아 주민들 역시 숭배하였기에 이를 통해 세 지역 간의 혈족의식을 다질 수 있었다. 고대 밀라사에서는 킬릭스라 불리는 두손잡이 술잔을 생산했다.

2.1. 고대

파일:Milas_Gümüşkesen_Mausoleum_in_2007_4836.jpg 파일:Milas_Gümüşkesen_Mausoleum_in_2007_4844.jpg
시가지 서쪽의 로마시대 영묘 (귀뮤슈케센). 기원전 4세기 축조로도 추정된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
파일:Milas_Gümüşkesen_Mausoleum_in_2007_4860.jpg
영묘 내부의 천장. 중앙에 페르시아식 연꽃 문양이 있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 밀라사는 카리아의 주요 도시 중 라나였고 리그담 왕조가 통치했다. 기원전 460-50년 델로스 동맹에 가담하기도 했다. 당시 카리아를 통치한 헤카톰노스 왕조는 페르시아 사트라프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문화적으로도 명문과 동전에서 나타나듯 헬라 문화권이었다. 마우솔로스 왕은 밀라사를 카리아의 수도로 삼기도 했다. 카리아 왕국 시기에 세워진 헤카톰노스 무덤은 후일 마우솔로스 영묘의 모델이 되었다. 카리아의 영토를 리키아까지 확장한 마우솔로스는 치세 말엽에 할리카르나소스를 수도로 고정했다. 이후 밀라사의 중요성이 하락했다.

기원전 3세기 밀라사는 디아도코이 전쟁에 휘말렸으나 번영을 구가했다. 다만 카이사르의 내전 시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수 라비에누스에게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재건되어 팍스 로마나 시기 인근 에우로모스, 올리모스, 라브란다 등 관할하는 카리아의 주요 도시로 번영했고 고대 사가들이 빈번히 언급했다. 기원전 1세기 스트라본 시기 밀라사는 에우티데모스 (Εὐθύδημος), 히브레아스 (Ὑβρέας)의 두 웅변가로 유명했다. 정적이었던 둘의 경쟁은 ' 필요악'이란 격언을 제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우티데모스가 죽었을 때 히브레아스는 그의 장례식에서 '너는 필요악이다. '우리는 너 없이 살 수 없지만, 또한 너와 함께 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제갈량 주유

2.1.1. 로마 제국

파일:33839038Master.jpg 파일:Milas_Baltalı_Kapı_4957.jpg
발라트 (도끼) 성문과 터키 전통 가옥. 아치 상단에 아르셀리스가 리디아에서 가져온 도끼가 새겨져 있다

로마 시기 밀라사에서는 사바지오스 숭배 등 프리기아의 관습이 행해졌고 이시스와 오리시스 숭배 등 이집트 관습도 행해졌다. 그외에 네메시스 신전도 있었다. 밀라사에서 발굴된 명문은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생애에 대한 몇 안되는 확실한 정보로, 112-13 아시아 총독으로 재임했다고 한다. 한편 카리아 지방은 소아시아에서 비교적 뒤늦게 기독교화되었다. 5세기 밀라사 주교 성 에프렘은 후일 1월 23일이 축일이 되는 등 기념되었고 이웃 도시 레우케에서 그의 성물 숭배가 이루어졌다. 에프렘 외에 키릴로스, 바울, 성 스테판 성당 세운 바실리오스 등의 주교가 기록되었다. 미셸 르 키앵에 의하면 성 세네는 로마인 여성 귀족으로, 부모의 강제성 결혼을 피해 남자 복장을 하고 본국을 떠나 에우세비아에서 세네 (이방인)로 개명한 후, 코스 섬에 살다가 밀라사에 살았다고 한다.

2.2. 중세

파일:Becin_5322.jpg
중세 시기 밀라스의 방어를 맡은 베친 성채
파일:Becin_5372.jpg
1300년 무렵부터 한세기 가량 멘테셰 후국의 수도였다.

7세기 들어 카리아 지방은 아랍 해군의 공격으로 쇠퇴했다가 1071년 이후 튀르크 인들에게 점령되었다. 1090년대 룸 셀주크로부터 카리아를 수복한 동로마 제국은 12세기 초엽 밀라사 테마를 세웠다. 이후 12세기 후반 밀레투스 부근 멜라누디온으로 치소 옮긴 후 밀라사와 멜라누디온 테마로 명명되었다. 그 관할 구역은 메안드로스 ~ 모르시노스 (반달라스 차이) 일대였고, 해안은 기존 키비르하요트 테마에 속했다. 마누일 1세 치세에 키비르하요트 테마를 해체하고 코스 섬을 중심으로 한 도데카니사 제도 테마에 병합되었다. 다만 밀라사 둑스가 해안과 도서에 통치권을 행사했다.

2.2.1. 멘테셰 후국

파일:Beçin_fortress_5266.jpg
베친 성채 기슭에는 멘테셰 후국기 유적들이 남아있다. 왼쪽부터 크즐 한, 오르한 베이 자미, 아흐메트 가지 마드라사
파일:Milas_Ulu_Camii_in_2015_5010.jpg
1378년 멘테셰 베이국 시절에 세워진 울루 자미 (대사원)

일대에는 여러개의 동로마 성채가 세워졌고, 라트로스 산에는 번성한 수도원 공동체가 있었다. 다만 13세기 말엽 튀르크계 멘테셰 후국이 점령하였다. 1204년 4차 십자군 후 밀라스는 로마 가톨릭 명목상의 주교구 밀라센시스로 남았고, 1966년 마지막 주교 사망한 후 공석이 되었다.

멘테셰 베이는 본래 밀라스를 수도로 삼았다가 더 방어에 용이한 5km 거리의 베친 성채로 천도하였다. 1390년 멘테셰 후국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고 1402 재독립했다가, 1420 메흐메트 1세에게 완전히 병합되었다. 이후 멘테셰 산작의 치소가 무을라로 정해지며 밀라스는 카리아의 중심지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2.3. 근현대

파일:Beçin_fortress_view_of_Milas_5254.jpg
현대 시가지 전경

1912 기준 밀라스의 9천 인구 중 2900명이 그리스인, 1천이 유대인이었다. 이는 소아시아 서부임을 감안하더라도 비무슬림 비중이 높은 편인 것이었다. 다만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당시 그리스 정교도들이 이주되었고, 그리스계 튀르크 무슬림이 정착하였다. 한편 유대인은 1950년대에 이스라엘 이주한 후에도, 양국 관계가 괜찮아 그 후손들은 지금도 종종 방문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