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미상(未詳) |
자(字) | 사겸(士兼) |
본관 | 여흥 민씨(驪興閔氏) |
출생 | 1873년 7월 8일 |
경상남도 산청 | |
사망 | 1925년 12월 29일 |
묘소 | 경상남도 산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생애와 주요 활동
경상남도 산청(山淸) 출신의 독립유공자 민치방(閔致方)은 1919년 3월 22일 산청군 산청읍에서 이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동경(도쿄)의 유학생인 오명진(吳明鎭)이 독립선언서와 함께 향리인 산청으로 귀환함에 따라 추진된 해당 독립만세 운동은 3월 18일, 오명진과 민영길(閔泳吉), 신영희(申永熙), 오원탁(吳元卓), 최오룡(崔五龍), 신창훈(愼昌勳), 신몽상(申夢相) 등의 비밀회합으로부터 첫 발단을 이루어 냈다.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결사대를 조직한 그들은 산청읍의 장날인 3월 22일에 의거의 실행을 약조한 후 준비를 도모했다.
산청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신영희의 거처로 비밀리에 이동시킨 그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서 2천여 매의 등사와 태극기의 제작을 진행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 동지들과 군중을 모았다. 그러나 대대적인 규모의 의거로 확대하고자 산청군수인 홍승균(洪承均)에게 연락을 취한 과정에서 그의 밀고가 발생한 끝에 그들의 계획이 일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 결과 독립선언서가 압수되었으며 민영길 등 만세운동의 주도 인물들이 붙잡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사의 당일, 산청읍의 장터에는 군중들이 집합하였다. 이어서 정오 시각에 다다르자 시위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진행했다. 그들 속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의 행진을 주도했던 민치방은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에 의해 팔에 부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1925년 사망한 그에게는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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