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로구 출신 독립운동가, 민창식
성명 | 민창식(閔昌植) |
이명 | 김무, 쥬라블례프, 쥬라블레프, 박무 |
본관 | 여흥 민씨 |
생몰 | 1899년 9월 21일 ~ 1938년 4월 11일 |
출생지 |
한성부 북부 안국방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민창식은 1899년 9월 21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동학교에서 수학한 후 대동인쇄사와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사 인쇄직공으로 일했으며, 1920년대에 연우사(鉛友社) 동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회원, 혁청당(革靑黨) 당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 회원이 된 그는 1925년 서울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京城印刷職工組合)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인쇄직공 등의 노동자 권익 확보를 위해 힘쓰며 대동인쇄주식회사(大東印刷株式會社)·창신인쇄주식회사(倉新印刷株式會社) 파업 등에 참여했다.
당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직공 파업은 인쇄소 직공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 측은 직공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해놓고는 오히려 주모자 등을 해고하였다. 이에 직공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고, 민창식은 직공들과 함께 동맹 휴업을 벌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직공파업 때에도 이를 원조하고자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강연하기도 했다. 한편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민창식은 활동범위를 넓혀 청년운동 및 사회주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위원으로 인쇄직공조합이 설치된 경성부 제2구 제1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 격문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한 그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하도록 하기 위해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선전문을 배포했다. 그러나 거사 전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고,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자택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38년 4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민창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김포시 출신 독립운동가, 민창식
성명 | 민창식(閔昌植) |
자 | 성일(聖日) |
본관 | 여흥 민씨[1] |
생몰 | 1888년 12월 28일 ~ 1948년 8월 15일[2] |
출생지 |
경기도 통진도호부 월여곶면 조강포리 (현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91호 |
추서 | 대통령표창 |
민창식은 1888년 12월 28일 경기도 통진도호부 월여곶면 조강포리(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에서 아버지 민영호(閔泳祜)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8일 최우석·정인교(鄭仁敎)·윤종근(尹鍾根)·윤영규(尹寧圭)·박용우(朴容雨) 등과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하고, 3월 28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거사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켰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밤, 민창식 등은 주민 수십면과 함께 조강리와 갈산리의 함반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8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민창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