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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민영훈(閔泳熏) |
호 | 효강(曉岡) |
본관 | 여흥 민씨[2] |
출생 | 1911년[3] 5월 12일 |
전라남도
동복군 외남면 상사리 (현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사평리 상사마을)[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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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3년 4월 20일 |
전라남도 화순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11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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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영흥은 1911년 5월 12일 전라남도 동복군 외남면 상사리(현 화순군 사평면 사평리 상사마을)에서 아버지 민용호(閔龍鎬, 1875 ~ 1970. 1. 2)와 어머니 파평 윤씨(1872 ~ 1951. 9. 14) 사이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민주현(閔冑顯, 1808 ~ 1882. 1. 6)은 1851년( 철종 2) 제2회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여 종2품 병조 참판에 올랐는데, 1879년( 고종 16) 정4품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조부 민부(閔埠, 1845 ~ 1877. 11. 14) 또한 문사에 능하여 1876년(고종 13)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0위로 입격했다. #그는 이후 광주군 광주면 성저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동)으로 이주하여 윤재일(尹在日)의 집에 하숙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0월 30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11월 3일 같은 학교 학생 20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약간 명과 함께 광주고등보통학교 대기실에서 회합하여 10월 30일의 충돌사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오를 정렬하여 번화가를 누비며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이후 11월 3일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광주 읍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금고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이후 화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3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민영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3일 화순군 사평면 검산리 화산마을 선영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