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상익(常翊)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85년 5월 2일 |
강원도 홍천현 영귀미면 성수리 (현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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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년 12월 30일[2] |
강원도 홍천군 | |
묘소 |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개운리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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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민병찬과 민병태· 민병숙 형제와는 10촌 지간이다.
2. 생애
민병두는 1885년 5월 2일 강원도 홍천현(현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에서 아버지 민윤식(閔胤植, 1859 ~ 1890. 6. 7)과 어머니 원주 이씨(1880년생)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4월 2일 홍천군 동면 성수리에서 여흥 민씨 문중이 주동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태극기 2,000여매를 일가친척들과 함께 만들어 속초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줬다. 이후 민병찬이 면사무소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뒤따라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군중을 주도하여 홍천읍으로 행진하려다가 10촌 형인 동면장 민병선(閔丙善, 1870 ~ 1943. 4. 19)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튿날 다시 모이기로 했다.
다음날인 4월 3일 시위군중이 약속대로 면사무소 앞에서 다시 모이게 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과 격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면장의 계략에 속았음을 알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일군 헌병의 무차별 발포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했다. 이 일로 체포된 민병두는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주동자인 김덕원(金德元)과 함께 탈출하여 김덕원의 사촌동생 집에 임시 피신하고 있다가 경성부에 있는 34촌 지간의 족조(族祖)인 민영휘의 집에 은신하였다.
1920년, 민병두는 중국으로 망명한 민병찬에게 국내정황을 알려주며 군자금을 모아 송금하는 등 활동하다가 더 이상 은신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정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923년 6월 부친의 기일을 맞아 귀향한 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곤궁하게 생활하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60년 12월 30일 홍천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민병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