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대한 내용은 미하일 1세 랑가베스 문서 참고하십시오.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187, #0039A5 20%, #0039A5 80%, #00218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류리크 왕조 | 고두노프 왕조 | ||
이반 4세 | 표도르 1세 | 이리나 고두노바 | 보리스 고두노프 | |
고두노프 왕조 | 비왕조 | 슈이스키 왕조 | 바사 왕조 | |
표도르 2세 | 가짜 드미트리 1세 | 바실리 4세 | 블라디슬라프 지기몬토비치 | |
로마노프 왕조 | ||||
미하일 1세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표도르 3세 | 이반 5세 | |
표트르 1세 |
}}} }}}}}} |
<colbgcolor=#0039A5><colcolor=#fff> | |||
|
|||
출생 | 1596년 7월 22일 | ||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
사망 | 1645년 7월 23일 (향년 49세) | ||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
묘소 | 대천사 성당 | ||
재위기간 | 루스 차르 | ||
1613년 2월 21일 ~ 1645년 7월 23일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9A5><colcolor=#fff> 가문 | 로마노프 가문 | |
이름 |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
||
아버지 |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 ||
어머니 |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셰스토바 | ||
형제자매 | 타티아나 | ||
배우자 |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돌고루코바 (1624년 결혼 / 1625년 사망) | ||
예브도키야 루캬노바 스트레시네바 (1626년 결혼) | |||
자녀 | 이리나, 펠라기아, 알렉세이, 안나, 마르파, 이반, 소피아, 타티아나, 예브도키야, 바실리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clearfix]
1. 개요
루스 차르국의 차르.러시아 제국까지 이어지는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로, 표트르 대제의 할아버지이다. 현재 러시아 영토의 80%정도를 완성시킨 차르이며 아들과 손자도 영토확장을 많이 했다.
2. 생애
이반 4세 사후 동란 시대를 거쳐 젬스키 소보르(전국 회의)에서 루스 차르국의 새 차르를 선출했는데, 그는 공포의 이반 4세의 첫 번째 황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의 오빠인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였다.겨우 16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 때 수녀되기를 강요당했던 어머니를 따라 수도원에 살았던지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주변 친척들이 대부분 정치를 담당했다. 시작 배경이 이러다 보니 손자, 표트르 1세의 시절까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들은 대 보야르, 정교회의 집중 견제를 받아 왕권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즉위 초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정전 협정을 맺었으나 그 대가로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잉그리아를 할양했으며 덤으로 카렐리야 일부 지역까지 할양했다. 여담으로 잉그리아를 양도할 때 웃픈 일화가 하나 있는데 발트해로 나갈수 있는 유일한 지역을 할양하는게 맞나 싶어서 고민했다가 나라 상황도 어려우니 그냥 짐짝(...) 덜자는 생각으로 할양 조약에 서명했다고...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와도 데울리노 휴전협정을 맺어 스몰렌스크 등을 양도했다.
1619년부터는 정교회 수도자였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잡혀갔던 그의 부친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가 귀국하여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고 동시에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633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 다시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귀족들과의 정쟁에서 패배하고 농노제를 강화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그문트 3세가 죽자 즉위 초 빼앗겼던 스몰렌스크를 되찾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했으나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에게 탈탈 털리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넘어간 영토 할양을 최종 인정하고 루스 차르국의 무능함만 드러내는 치욕만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