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후미카와 진칸(文川仁甲) |
자 | 곡암(谷岩)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923년 7월 11일 |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반여리 (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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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8년 2월 17일 |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부산광역시의료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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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문인갑은 1923년 7월 11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반여리(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서 아버지 문영택(文榮澤)과 어머니 경주 박씨(慶州 朴氏)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해주 오씨 오학찬(吳學讚)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그는 1937년 동래중학교에 입학했고, 동래중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상남도 연합 군사 대연습에 참여했다가 부산 항일 학생 의거에 가담한 혐의로 정학당했다. 1941년 12월 동교생 김일규(金一圭), 양중모(梁仲模) 등이 조직한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에 가입했다. 그는 당원들과 함께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열어 행동 방략을 협의했고,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 행동을 개시했다.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1944년 8월 1일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한 당원들은 군사기밀 탐지, 일본군 탄약고 폭파, 군용열차 통과시 구포다리 폭파 등의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 일본군에 입대한 후 때를 봐서 탈영해 연합군 진영으로 들어가서 중국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또한 그들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과도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1944년 7월 순국당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그해 8월 조선독립당도 발각되면서 당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때 문인갑도 체포되었고 미결수 신분으로 부산형무소에서 1년간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이후 수필가로 활동하면서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그는 2008년 2월 17일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부산광역시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문인갑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8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1]
판도판서공파-광릉 와리파 26세 갑(甲)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