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3:15:56

몽유도원도

파일:Mongyudowondo.jpg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1]

1. 개요2. 구성 및 형식3. 특징4. 일본으로의 반출

1. 개요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 산수화 안평대군에 도원에서 본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세종 29년인 1447년에 그렸다.

2. 구성 및 형식

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의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와 발문, 그리고 1450년(세종 32)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20여 명의 당대 문사들과 1명의 고승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이 곁들여져 있다. 글과 그림이 어울려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이와 같은 서화합벽(書畵合璧)은 세종대에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안평대군과 더불어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 박연, 김종서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다.

첫 번째 두루마리에 박연의 시문까지, 두 번째 두루마리에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서는 일본에서 다시 표구할 때 변형된 결과로 여겨진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숙주의 찬문이 맨 앞에 배치된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는 고득종의 찬문이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3. 특징

특이한점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냐면, 안견의 사인이 오른쪽에 있다. 짐작하겠지만, 그림을 다 그리고 맨 끝 쪽에 사인을 남기게 되는 습성에 따라 사인이 있는 쪽이 회화의 흐름의 끝이다.

왼편의 현실 세계와 오른편의 도원 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 세계는 부감법을 구사하였다.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또 시문은 각 인물의 친필로 쓴 것이어서 그 내용의 문학적 특징은 물론 서풍까지 파악할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그림은 안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견의 유일한 진작(작가가 명확히 확인된 작품)이다. 전칭작(명확하지 않으나 작가가 추정되는 작품)은 이것 말고도 약간 더 있지만 진작은 몽유도원도뿐이다.

4. 일본으로의 반출

일본 나라현의 덴리 대학 중앙 도서관이 소장 중이며, 현재 중요 문화재 회화 제1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약탈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의 소장품으로 검안까지 찍어 등록했기 때문. 이후 여러 소장가의 손을 거쳐 1955년경부터는 덴리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1986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의 '조선초기서화전'에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겨울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국보전'에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9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때 9일간 전시된 것이 세 번째이다. #

비록 몽유도원도는 일본에 있지만 그 원천인 무계정사와 아름다운 후원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안평대군은 현재 종로구 부암동 321-2번지 일대 입구에 무계정사를 짓고 후원에 복숭아 천 그루를 심었다. 현재 무계원은 활터, 무계동 각자 후면은 무계정사지, 현진건 집터는 연못, 몽유도원도전시관 주변은 폭포, 부암동 321-2번지의 무계동언덕 일대가 후원이다. 후원이 경치가 뛰어나다.

안평대군의 무계수창시와 박팽년 성삼문 서거정의 차운시와 이개의 무계정사기가 남아 있다.

해외 소장 중인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단 9일간 전시된 2009년 때는 진품 몽유도원도를 볼 수 있는 매우 어려운 기회이다 보니 1분으로 관람 시간을 제한할 정도였다. 한국 측에서 몽유도원도에 대한 반환 혹은 인도 요청을 할까 봐 덴리 대학은 몽유도원도를 거의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덴리대 도서관은 대여해 주는 일도 거의 없고, 웬만한 전시회에는 진품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복제본을 대여해 준다고 한다.

1949년에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이를 구입할 만한 한국인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2]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때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한 전형필이 구입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유는 불분명하나 전형필은 몽유도원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1930년에 전형필이 몽유도원도를 구입할 기회가 있었으나, 하필 이때 전형필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느라 함부로 많은 돈을 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놓쳤다는 일화가 퍼져 있는데, 이는 전형필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간송 전형필에서 나온 창작이다.

2023년 12월에 한국 환수를 추진하는 협약이 체결되었다. 세계경제문화교류협의회가 일본이본궁기념재단, 덴리대와 환수 협약을 맺은 것. 다만 몽유도원도가 일본의 국보이기 때문에 국보 지정 해제 등의 절차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 한다. #

[1] 꿈속에서 놀았던 도원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2] 일설에 따르면 이 당시 일본인 미술상이 6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에 팔고자 하였는데, 그 당시 60만 원이면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이었던 종로의 집 한 채 가격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