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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제3대 샤한샤
모하마드 샤 카자르 محمد شاه قاجا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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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
모하마드 샤 카자르 محمد شاه قاجار |
출생 | 1808년 1월 5일 |
카자르 왕조 타브리즈 | |
사망 | 1848년 9월 5일 (향년 40세) |
카자르 왕조 테헤란 | |
재위 기간 | 카자르 왕조 샤한샤 |
1834년 10월 23일 ~ 1848년 9월 5일 (15년) | |
전임자 | 파트 알리 샤 카자르 |
후임자 | 나세르 알딘 샤 카자르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clearfix]
1. 개요
카자르 왕조의 제3대 샤한샤.2. 생애
당시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카자르 왕조는 파트 알리 샤 카자르의 실정 아래에서 골골대는 형편이었다. 허나 파트 알리 샤가 죽은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화되는 모습만 보였다. 파트 알리 샤가 죽고 즉위한 모하마드 샤 카자르는 몇 달간의 짧은 내전을 끝내고 새로운 샤로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교사였던 카'엠 마캄을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이미 카'엠 마캄에 대한 샤의 신뢰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카'엠 마캄의 행보 역시 적을 수없이 만들었기에 정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카'엠 마캄은 모든 왕자들에게 모하마드 샤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제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재산과 영지를 몰수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역시 모하마드 샤의 내란 진압 과정에서 그를 지원했기에 상을 바라고 있었으나 카'엠 마캄의 반대로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자 그에게 원한이 쌓인 상태였고, 모하마드 샤의 삼촌 알라야르 칸 야세프 역시 카'엠 마캄의 충성 맹세 강요로 그에 대한 비호감도가 최고치를 막 찍던 상태였다.카'엠 마캄은 러시아 제국과 영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러자 그의 정적들은 당장 모하마드 샤에게 달려가 카'엠 마캄이 월권을 시도하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정적들이 끊임없이 샤한샤를 설득하자 홀랑 넘어간 모하마드 샤는 결국 1835년 6월 카'엠 마캄을 체포하고 옥에 가두어버렸으며 4일 후에 아예 죽여버렸다. 대재상을 죽여버린 모하마드 샤는 몇 달동안 재상 없이 국정을 운영하다가, 어릴 적 종교적 스승이자 수피즘 신자 '하즈 미르자 아카시'를 새 재상으로 임명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쳤지만 어릴적부터 아카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워낙 굳건했기에 그냥 씹어버렸다.[1] 혼란상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았다. 1837년에는 혼란스러운 케르만 지방을 안정시키라고 보낸 아가 칸 1세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2]
야심차게 추진한 헤라트 원정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하마드 샤는 즉위 직후부터 아프가니스탄 헤라트 일대를 먹으려 시도했다. 아프가니스탄 고원 지대에 사는 페르시아계 부족들을 통합하고 그 곳에 사로잡혀있던 수많은 이란인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허나 이는 인도 제국을 다스리고 있던 영국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페르시아는 일전의 투르크만차이 조약 11조에 따라 러시아에게 국경 내에 무역로를 내준 상태였는데, 이 페르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먹어버린다면 이는 곧 러시아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1837년에 결국 전쟁이 터졌다. 모하마드 샤는 8만 대군을 이끌었고, 헤라트의 캄란 샤는 여러 수니파 부족들의 연합군을 모아 그에게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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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트 공성전 | 현대 헤라트의 모습 |
이와중에 이스파한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매우 부유하고 저명한 성직자였던 모함마드 바게르 샤프티가 천대받는 하층민족인 루티인들을 규합해 1838년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라마잔 샤'라는 새로운 왕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라마잔 샤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는가 하면 옛 사파비 왕조의 후손의 지지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특히 그동안 천대받던 루티인들은 바게르 샤프티에게 열렬히 동참했고, 덕분에 바게르 샤프티는 1838년부터 1840년까지 약 2년여에 걸쳐 이스파한을 다스릴 수 있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모하마드 샤는 격노했다. 그는 6만 대군을 이끌고 헤라트에서 이스파한으로 되돌아갔고, 종교 성지로 여겨지던 이스파한에 포격을 불사하며 반란군을 쓸어버리고자 했다. 수많은 대군이 몰려오자 겁에 질린 바게르 샤프티는 이스파한의 북문을 열었고 대부분의 루티인들은 남문으로 도망쳤다. 이스파한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모하마드 샤는 루티인들을 몰살했고 샤프티의 아들을 아스트라바드로 유배했다.[3] 이스파한의 반란 진압으로 헤라트의 뼈아픈 패배를 잊고 싶었던 그는 자신에게 '이슬람의 전사'라는 뜻의 '가지' 칭호를 하사한다.
오스만 제국과의 뿌리깊은 국경분쟁도 지속된다.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왕조 시절부터 페르시아와 국경 분쟁을 해온 오랜 라이벌이었다. 당연히 이 국경분쟁이 카자르 왕조 시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오스만 제국의 바그다드 총독인 알리 레자 파샤가 1837년 코람샤흐르 지방을 약탈한 것에서 시작됐다. 격분한 카자르 왕조는 바로 오스만에게 격렬히 항의했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와 오스만 사이의 해묵은 국경 갈등이 재점화됐다. 1842년에 에르주눔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약 5년 가까이 이어졌다. 각종 사건사고들이 터지며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결국 샤트 알 아랍과 코람샤흐르가 페르시아의 소유로, 조하브와 술라이마니야가 오스만의 소유로 확정된다. 러시아와 영국의 중재로 결국 이렇게 협상안이 타결되나 싶었지만 오스만 정부가 몰래 3개의 조항을 추가하고야 말았다. 이 조항에 따르면 페르시아는 샤트 알 아랍의 영유권을 빼앗겼고, 코람샤흐르에 대한 소유도 제한된다. 당연히 페르시아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모하마드 샤는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지만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4]
1840년대에는 페르시아만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되었다. 이같은 배경에는 영국의 압력이 있었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약 4~5000여 명의 노예들이 매년 페르시아에서 거래되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영국 측에서 페르시아에 압력을 넣었던 것. 모하마드 샤는 영국의 제안에 부정적이었지만 영국이 오스만의 노예무역 폐지를 예시로 들면서 끊임없이 설득하자 결국 제안에 설득당했다. 그로써 1840년대 말에 페르시아 만의 노예 거래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노예 소유 자체와 육지에서의 노예 거래는 여전히 유지되었다는 한계는 있었다. 대재상 아카시는 전국에서 노예 거래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뜻에 잘 따라주지 않았다. 대다수의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노예 무역이 신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해석했고, 대부분의 페르시아인들은 노예무역 폐지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제 입맛에 맞는 율법학자들을 골라 홍보하는 등 노예무역 폐지에 힘을 기울였다.
모하마드 샤는 말년에 끔찍한 통풍에 시달렸다. 하도 고통이 심하자 샤는 국정에 관심을 잃어버렸고, 모든 권력은 그가 가장 총애하던 권신 아카시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아카시는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던 인물이었으며 아편에 찌든 인간이었다. 제대로 국정이 돌아갈 리가 없었지만 모하마드 샤는 죽을 때까지 아카시에 대한 통제를 하지 않았다. 왕위 후계구도도 흔들렸는데, 자신의 건강을 우려한 모하마드 샤가 세워놓은 섭정 바흐만 미르자가 왕세자 나세르 알딘 왕세자를 내쫒고 왕위에 오를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세르 알딘이 결혼동맹으로 기반을 공고히 하며 이같은 혼란은 수습되었지만 카자르 왕조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다.
[1]
아카시는 모하마드 샤 재위기 내내 대재상직을 유지하며 굳건한 총애를 받았다. 그가
수피즘 신도였던 탓에 모하마드 샤 역시 수피즘을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기까지 했고, 이는 페르시아인들이 그 둘을 경멸조로 묶어부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아가 칸 1세는 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안정화 직후 샤가 자신을 교체하고 샤의 측근을 제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걸 깨닫고 격분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자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당했다. 아가 칸 1세는 1838년까지 연금당해 포로로 지내다가 그 후에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도록 허락받았다.
[3]
샤프티가 아무리 반란자일지라도 고명한 성직자였기에 함부로 죽일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잘못 그를 죽여버리면 전 무슬림들의 항의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국경 분쟁은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 난 후에도 계속된다. 오스만에서 독립해나온
이라크가 이란 간의 국경 분쟁을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