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22:52:03

모이미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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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미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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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모라비아 공국 초대 공작
모이미르 1세
Mojmír I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모이미르 1세
(Mojmír I)
라틴어 모이마루스
(Moimarus 또는 Moymarus)
출생 미상
사망 846년 8월경
재위 모라비아 공국의 공작
820년대 또는 830년대 ~ 846년
조카 라스티슬라프
아버지 모이미르?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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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라비아 공국 초대 공작.

2. 행적

기원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보헤미아 출신의 가톨릭 성직자이자 역사가였던 얀 토마시 페시나 이 체코로두(Jan Tomáš Pešina z čechorodu, 1629 ~ 1680)에 따르면, 그는 슬라브 부족들을 끌어모아 제국을 건국했던 사모의 직계 후손이며, 804년에서 806년 사이에 파사우 주교 우롤프에게 세례를 받고 811년부터 820년까지 모라비아인들을 통치했다고 전해지는 모이미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프리울리 공작 에리히를 섬겼던 8세기 슬라브 귀족 보이노마르가 모이미르의 아버지였다고 주장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모이미르라는 이름은 알란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이미르 1세가 언제 모라비아의 통치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빠르면 820년대, 늦어도 830년대 초반일 것으로 추정된다. 833년경, 그는 니트라 시에 교회를 짓고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람의 축성을 받았던 경쟁자 프리비나(Pribina)를 모라비아에서 추방했다. 프리비나의 정확한 지위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프리비나를 니트라의 공작이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그를 모이미르 1세의 총독이며 모이미르 왕조의 일원일 거라고 주장한다. 만약 프리비나가 니트라를 중심으로 한 독립 공국의 공작이었다면, 모이미르 1세가 이 시기에 그를 쫓아내면서 모라비아가 통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프리비나는 추방된 후 트라이스마우어에서 세례를 받았고, 루트비히 2세로부터 로어 판노니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로어 판노니아 공국은 모라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이 신성 로마 제국에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는 보루 역할을 수행했다.

<다뉴브 강 북쪽의 도시와 땅에 대한 설명>이란 제목의 중세 라틴어 문헌에 따르면, 모라비아인은 총 11개의 시비타테(civitates, 성 또는 도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모이미르 1세 치하의 모라비아 공국의 경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앗지만, 학자들은 서쪽의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 남쪽의 다뉴브 강, 동쪽의 바흐 강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루마니아 서부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라비아 일대는 800년 파사우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13세기에 저술된 <파사우 주교구와 바이아른 공국의 역사>에 따르면, 파사우 주교 레긴하르가 831년에 모든 모라비아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라비아 일대에서는 9세기 중반까지 이교도 관습이 행해졌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모이미르 1세와 가족 및 친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모라비아인들 전체를 개종시키지는 못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모든 모라비아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이교도 관습을 그대로 병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모라비아인들이 822년 루도비쿠스 1세에게 경의를 표한 이래, 신성 로마 제국은 모라비아를 봉신으로 여겼다. 제국 연대기에 따르면, 846년 8월 중순에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인들이 충성을 거부하자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그곳을 복속시키고 모이미르의 조카 라스티슬라프를 공작에 선임하고 질서를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전력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모이미르 1세가 조공을 바치길 거부하자 루트비히 2세가 무력으로 응징하고 폐위시킨 뒤 라스티슬라프를 공작에 세웠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모이미르 1세가 사망한 뒤 후계 분쟁이 벌어지자 루트비히 2세가 개입해 새 공작을 세우고 질서를 확립했다고 해석한다.


[1] 2019년 프라하 조폐국이 발행한 기념화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