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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의 베컴
1995년 자국의
페르세폴리스 FC에서 데뷔했다. 페르세폴리스를 3번 연속 리그 우승시키면서 1997년에는
AFC 올해의 영플레이어에 오르는 등 오른쪽 윙어로 이름을 날리던 마다비키아는 1998년 임대 형식으로 자국 선수들이 많이 진출하는 분데스리가의
VfL 보훔에 입단해 활약했다. 임대 이후 마다비키아는 보훔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본
함부르크 SV에 완전 이적을 하며 이전의 이란 축구 선배들 보다 한수 위의 기량을 선보이며 전설이 시작되었다. 이때 함부르크 지역언론에서 1999년 마다비키아의 시장 가치를 650만
마르크로 추정했다.1998-99 시즌 최종 기록: 12경기 3골 2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12 | 3 | 2 |
합계 | 12 | 3 | 2 |
사실 이적비화가 있었는데 마다비키아는 런던으로 건너가 토트넘과 3년 계약에 합의해서 계약서에는 이란에서 3년간 군 복무를 마친 뒤 토트넘으로 이적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로 3년 후 이적을 보장할 '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으면서 토트넘 이적이 무산됐다. 군문제가 아니었으면 이영표 손흥민보다 먼저 토트넘 유니폼을 입는 아시아 선수가 될 수도 있었는데 협상 테이블에 앉은 다음 클럽이 함부르크였는데 이조차도 똑같은 문제로 발목을 잡는 바람에 한동안 우울했고 살도 너무 많이 쪘지만 끝내 운명은 독일로 인도하였다고 회고하였다. #
함부르크에서 그는 본 포지션인 오른쪽 윙이 아닌 공격력을 살린 풀백으로 더 많이 기용되었다.[1] 분데스리가에서 그는 꽤나 좋은 풀백으로 인정받았고 팀 내 위상도 상당했다.
함부르크에서 데뷔시즌 이었던 1999-00 시즌에는 바이에른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2경기 연속 도움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고 팀이 분데스리가 3위에 오르며 다음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다. 1999-00시즌 16라운드 키커 이주의 팀에 처음으로 선정되었으며 # 분데스리가 4골 7도움으로 리그 두 자릿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고 UEFA 인터토토컵 4강 2차전에서도 멀티골을 넣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으나 결승전에서 몽펠리에 HSC에게 승부차기 끝에 안타깝게 패배한다. 커리어 처음으로 키커 랑리스테에 입성했는데 전반기 공격수 부분 B 클래스를 받았다. #
1999-00 시즌 최종 기록: 36경기 6골 7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9 | 4 | 7 |
DFB-포칼 | 1 | 0 | 0 |
UEFA 인터토토컵 | 6 | 2 | 0 |
합계 | 36 | 6 | 7 |
2000-01시즌 리그 4R 부터 도르트문트에게 2개의 도움을 바탕으로 키커 이주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 당시 분데스리가 강팀 샬케 04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는 등 4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함부르크의 많은 승리에 영향을 끼쳤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을 하였지만 본인은 제법 훌륭한 활약을 하였다. 그 당시 지네딘 지단, 에드윈 반 데 사르, 에드가 다비즈, 안토니오 콘테, 필리포 인자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다비드 트레제게 등등 당대 유명한 선수들로 구성된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이었는데 1골 1어시스트 그리고 페널티킥 유도까지 하면서 경기를 지배하였다. 그날 경기는 4대4 무승부로 끝났으며 반드시 이겨야 했던 유벤투스는 조별리그 4위로 탈락하였고 함부르크는 조별리그 3위로 UEFA컵 녹아웃 스테이지로 가게 된다. 그리고 분데스리가 5골 8도움으로 두 시즌 연속 리그 두 자릿수 공격포인트까지 기록하였다. 두번째로 키커 랑리스테에 입성했는데 2000-01 시즌 전반기 공격수 부분 B 클래스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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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 리그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시즌 |
2000-01 시즌 최종 기록: 40경기 9골 12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9 | 5 | 8 |
UEFA 컵 | 2 | 0 | 0 |
UEFA 챔피언스 리그 | 5 | 2 | 3 |
DFB-포칼 | 1 | 1 | 0 |
UEFA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 2 | 1 | 1 |
리가포칼 | 1 | 0 | 0 |
합계 | 40 | 9 | 12 |
2001-02 시즌 최종 기록: 11경기 1골 3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11 | 1 | 3 |
합계 | 11 | 1 | 3 |
2002-03 시즌에는 마다비키아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키커 13라운드 이주의 팀에 선정이 되었고 # 특히 30라운드에는 1골 2도움의 기록을 바탕으로 아예 키커 이주의 팀과 선수에 모두 선정되었다. # # 분데스리가에서 도움왕[2]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아시아 선수 최초의 유럽 5대리그 도움왕 기록이며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4도움을 하여 훗날에 후배 선수가 갱신하기 전까지 이란 역대 최다 챔피언스 리그 도움 기록이었고 본인의 통산 세 시즌 리그 두 자릿수 공격포인트였다.[3] 시즌 후반기 키커 랑리스테 윙어 부문 IK 클래스 1위로 분데스리가 윙어 중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으며 팀은 리그 4위로 UEFA컵에 진출하였다. #
2003년에 독일의 언론 디 벨트지에서는 마다비키아의 가치가 €800만~1000만 유로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2002-03 시즌 최종 기록: 36경기 6골 7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6 | 2 | 14[4] |
DFB-포칼 | 2 | 0 | 0 |
레기오날리가 노르트 | 2 | 0 | 0 |
합계 | 30 | 2 | 14 |
특히 2003-04 시즌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리가포칼 결승에서 선발출장하여 유럽 커리어 첫 우승 트로피를 얻었다. 2003-04 시즌에도 키커 2, 6, 22라운드 이주의 팀에 세차례 선정되었고 # # #, 두번 연속으로 키커 랑리스테에 입성했는데 2003-04 시즌 전반기 윙어 부분 B 클래스를 받았다. # 분데스리가 5골 8도움으로 통산 네 시즌 리그 두 자리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팀도 리그 8위로 UEFA 인터토토컵에 나가게 되어 함부르크 올해의 선수상을 두 시즌 연속 선정되면서 그 당시 함부르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3-04 시즌 최종 기록: 39경기 6골 8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2 | 5 | 8 |
DFB-포칼 | 2 | 1 | 0 |
UEFA 컵 | 2 | 0 | 0 |
리가포칼 | 3 | 0 | 0 |
합계 | 39 | 6 | 8 |
2004-05 시즌에는 전반기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벤치를 치키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러다가 후반기 부터 키커 28, 29라운드 이주의 팀 # #에 선정이 되었고 2005-06 시즌에는 시작부터 인터토토컵에서 우승하여 차범근 이후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한 아시아 선수이자 이란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키커 3 라운드 이주의 팀과 FC 샬케 04에게 결승골을 넣는 활약으로 키커 11 라운드 이주의 팀에 선정되었다. # #. 홈에서 1.FSV 마인츠 05에게 결승골을 기록하며 키커 21 라운드 이주의 팀에 선정되었고 FC 바이에른 뮌헨에게서 나이젤 더 용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키커 24 라운드 이주의 팀에 선정되었다. # # 리그 5골 5도움으로 통산 다섯 시즌 리그 두 자리수 공격포인트로 예전의 폼을 회복하며 다시금 핵심 선수로 발돋움했으며 팀을 리그 3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시키는데 공헌하였는데 라파엘 판데르파르트와의 연계 플레이도 좋았다. 2005-06 시즌 전반기에 키커 랑리스테에 선정이 되었는데 윌리 사뇰 다음으로 풀백 2위로 평가 받았다. #[5]. 그리고 2005-06 시즌 후반기에도 풀백 부문 B클래스 랑리스테에 선정이 되며 좋은 시즌을 보냈다. #
함부르크에서 별명은 마법의 양탄자처럼 상대를 마법처럼 미끄러지듯 돌파하는 모습으로 The Carpet[6]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06-07 시즌에는 풀백 생활을 청산하고 본 포지션인 오른쪽 윙어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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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선수 최초 UEFA 대회를 우승 |
2004-05 시즌 최종 기록: 27경기 2골 2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6 | 2 | 2 |
DFB-포칼 | 1 | 0 | 0 |
합계 | 27 | 2 | 2 |
2005-06 시즌 최종 기록: 44경기 6골 6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1 | 5 | 5 |
UEFA 컵 | 9 | 0 | 1 |
DFB-포칼 | 3 | 1 | 0 |
UEFA 인터토토컵 | 1 | 0 | 0 |
합계 | 44 | 6 | 6 |
2006-07 시즌 최종 기록: 38경기 2골 5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7 | 2 | 4 |
UEFA 챔피언스 리그 | 6 | 0 | 1 |
DFB-포칼 | 1 | 0 | 0 |
UEFA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 2 | 0 | 0 |
리가포칼 | 2 | 0 | 0 |
합계 | 38 | 2 | 5 |
시즌이 끝난 뒤 마다비키아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했다. 첫 시즌부터 그는 부상에 시달렸고 복귀한 뒤로도 폼이 회복되지 않아 방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09-10 시즌 그는 전반기에 1경기도 뛰지 못했다.
2007-08 시즌 최종 기록: 21경기 3도움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0 | 0 | 2 |
DFB-포칼 | 1 | 0 | 1 |
합계 | 21 | 0 | 3 |
2008-09 시즌 최종 기록: 14경기 | |||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12 | 0 | 0 |
DFB-포칼 | 2 | 0 | 0 |
합계 | 14 | 0 | 0 |
결국 2010년 1월 그는 스틸 아진으로 이적하며 10여년만에 자국 무대로 복귀했다. 2011년 마다비키아는 다마시와 계약을 맺었으나 시즌 중반 친정팀인 페르세폴리스 FC로 이적했다. 2013년 3월 14일에 축구선수 커리어 은퇴를 선언하였고 2013 하즈피 컵 결승전에서 교체 선수로 필드에서 들어와서 축구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2013년 11월 28일,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페르세폴리스 FC XI와 AC 밀란 XI의 고별 경기를 치르고 은퇴하였다. AC 밀란 XI가 3-1로 승리했으며 마다비키아가 페르세폴리스의 유일한 골을 어시스트 하였다.
분데스리가 통산 255경기 29골 55도움이며 유럽 커리어 종합 310경기 43골 62개 도움[7]이라는 역대급 활약을 보여주었다.
[1]
물론 공격력이 좋아 오른쪽 윙어나 스트라이커(!)로 나온 경기도 부지기수다.
[2]
14개
[3]
훗날 그
후배 선수는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에서 도움왕을 차지하며 아시아 선수의 유럽 리그 2번째 도움왕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4]
아시아 최초 유럽 리그 도움왕
[5]
우치다 아쓰토와
박주호는 풀백 7위가 최고점
[6]
독일어로 der Teppich
[7]
유럽 챔피언스리그 통산 11경기 2골 4도움